국민주택을 대량건설하여 국가의 주택난을 해소하고 국민의 주거생활 향상에 이바지하는 등, 정부의 주택정책을 시행하였다. 1962년 7월에 창립되었으나, 그 모체는 1941년 7월 1일 설립된 조선주택영단(朝鮮住宅營團)이다.
주요 업무는 주택의 건설·개량·공급 및 관리, 주택건설자재의 생산 및 공급, 대지의 조성과 공급, 신도시의 건설, 도시계획사업 수행이었다. 공사는 1998년 10월 당시 사장·감사·이사 등 임원진과, 5,900여 명의 직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공사는 홍보실·비서실·감사실·기획조정실·경영관리실·정보관리실·연구개발실·비상계획실 등 8개의 실과, 인력개발처·사업계획처·택지계획처·경리처·건설관리처·판매관리처·도시정비처·기술계획처·건축설계처·토목설계처·기계설계처·사업계획처 등 12개의 처 및 서초사업단·도시개발기획단과 10개 지사로 조직되어 있었다. 자본금은 1997년 8월 현재 8조 원으로 하고 정부가 그 전액을 출자하였다.
그리고 공사는 자본금과 적립금의 합계액 4배의 범위 안에서 원리금 상환을 정부가 보증하는 조건으로 사채를 발행할 수 있었다. 창립 이래 1987년까지 총 44만 5,477호의 주택을 건설하였다. 공사 설립 이래 1972년까지 10년 동안 건설한 주택은 연평균 1,170호였으나, 1973년부터는 급격히 증가하여 1974년 1만 호, 1977년 2만 호, 1979년 3만 호를 건설하였다.
1980년대에 와서는 연평균 4만 호 이상을 건설하여 매년 창원시와 같은 규모의 건설능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1987년 3만 7,000호를 건설하였다. 주택건설지역도 전국 56개의 시와 33개의 읍을 포함, 총 89개의 도시에 걸쳐 전국의 무주택국민들에게 고루 혜택을 주었다.
그 동안 공급한 주택을 규모별로 보면, 50㎡형(15평) 이하가 전체의 54%로 저소득층의 내집마련에 기여하였으며, 51∼66㎡형(15∼20평)이 27%, 67∼83㎡형(20∼25평)이 8%, 84㎡형(25평) 이상이 11%였다. 또한, 내국인을 위한 주택건설 뿐만 아니라 주한외국인들의 주거안정에도 기여하고자 외인주택도 건설하여, 전국 7개 지구에서 2,568호를 임대하였다.
1962년 우리 나라 아파트시대의 막을 연 서울 마포아파트를 비롯하여, 최초의 고층아파트인 한남외인아파트·남산외인아파트, 최초의 맨션아파트인 한강맨션아파트·한강외인아파트, 반포아파트·잠실아파트·둔촌아파트, 광명시의 철산아파트, 경기도 과천신도시, 서울의 개포아파트·고덕아파트단지, 군포 산본아파트단지, 부천 중동아파트단지, 상계 신시가지와 광명하안지구 등이 있다.
1989년 서울 번동에 국내 최초의 영구임대주택을 건설하였고,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영구임대주택 14만 호를 건설하였으다. 1991년에는 경기도 안산시에 국내 최초로 근로자주택을 건설하였다. 이어 1997년까지 근로자주택 13만 호를 건설하였다. 1998년 오산 운남지구 아파트단지를 완공하였다.
한편, 공사는 1988년 총 4만 호의 주택을 건설하였는데, 이는 1988년도 우리 나라 총 주택건설 34만 호 가운데에서 공공부문 21만 5,000호의 18.6%를 차지하는 비중이다. 또한, 1988년 서울올림픽경기대회에 대비한 도심기능의 회복과 환경개선을 위하여 서울 을지로지구의 도심개발사업을 시행하여 1997년 11월에 완료하였다.
1995년 21세기 장기비전을 수립하였고, 이어 안전진단 전문기관으로 지정되었으며, 1996년에는 주택건설 100만 호를 건설하는 대과업을 달성하였다. 그 뒤 1998년에는 주택관리전문회사인 ‘뉴하우징’을 설립하였다. 1997년에 본사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175번지로 이전하였다.
2009년 10월 1일 한국토지공사와 통합하여 한국토지주택공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