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하 대한노총)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가 주도하는 노동계를 와해시키기 위해 전진한(錢鎭漢) 중심의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이하 독청) 맹원들 주도로 1946년 3월 10일 결성되었다. “모든 번잡한 이론을 타파”한다고 한 선언문은 반공의지를, 강령은 노자협조주의를 표명했다.
결성 당시 임원은 위원장 홍윤옥(洪允玉), 부위원장 김구(金龜)·이일청(李一靑), 서북사무국 권영빈(權寧彬), 총무부장 김종율(金鍾律), 조직부장 배창우(裵昌禹), 후생부장 김제희(金濟禧) 등이었고, 고문으로 이승만(李承晩),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안재홍(安在鴻), 조소앙(趙素昻)을 추대했다.
대한노총에는 한국독립당계, 구국민당계, 이승만·한국민주당계 등 다양한 세력이 존재했지만 1946년 9월총파업을 계기로 전진한 체제가 들어서면서 이승만·한국민주당계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지역별체제를 근간으로 한 대한노총 조직체계는 지역별로 조직된 청년단과의 협력관계를 원활히 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정치적 목적에서 출발한 대한노총은 미군정, 우익정치인, 우익청년단, 경찰 등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특히 좌익세력 파괴·와해 공작에서 대한노총과 경찰은 공조체제를 유지했다. 미군정은 법령 제97호(1946년 7월 23일)를 통해 대한노총 육성 의도를 명확히 했다.
전평이 주도한 1946년 9월 총파업과 1947년 3·22 총파업을 계기로 대한노총은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했고, 1947년 후반부터는 좌익 소탕을 위한 건설대 활약으로 조직 확장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전평은 급속도로 와해되어 갔지만 1947년 말까지만 해도 대한노총 조합원은 아직 84,363명에 불과했다. 공산주의와 전평 타도라는 정치노선에 충실한 조직이었던 대한노총은 정부수립 후 1948년 8월 26∼27일 사이에 개최된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대한노동총연맹으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