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서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대한독립단 특파대장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0년(고종 27)
사망 연도
1920년
출생지
황해도 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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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대한독립단 특파대장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황해도 장연 출신. 한미한 가문의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재능과 무예가 출중했으며 애국심이 강하였다.

1907년 국내에서 신민회가 조직된 이후 1910년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할 때 김구(金九)로부터 이 계획을 통고받았다.

김구는 서울에서 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안태국(安泰國) 등과 함께 회의를 한 뒤, 11월 황해도 안악의 김홍량(金鴻亮), 신천의 유문형(柳文馨), 장연의 이명서 등에게 이 문제에 관한 협조를 구하였다.

이명서는 김구의 계획에 동의하고 우선 김구의 안내로 어머니와 동생 이명선(李明善)을 서간도로 보내 추후에 들어오는 동지들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게 한 후 본인도 곧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15일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대한독립단이 조직되자 특파대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6월 단원 이근영(李根永)·박기수(朴基洙)·주의환(朱義煥)·이지표(李芝杓)·민양기(閔良基)·박지영(朴枝英)·고두환(高斗煥) 등과 함께 황해도 지방에서의 무장활동 임무를 띠고 국내로 파견되었다.

구월산(九月山) 아래 황해도 은율에 도착한 그들은 이 군의 애국지사 김난섭(金蘭燮)·홍원택(洪元澤)·박형진(朴炯鎭)·박능묵(朴能默)·이현규(李鉉奎) 등의 동지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먼저 현직 군수인 최병혁(崔丙赫)을 사살하기로 하였다. 최병혁은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적극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계속 친일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이명서는 일행과 함께 같은 해 8월 15일 밤 전원을 3부대로 나누어 1대는 친일군수 최병혁을, 1대는 친일파 고학륜(高學倫)을 처단하기로 하고, 1대는 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하였다. 이명서는 이 가운데 민양기 등과 함께 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하였다.

이명서는 주재소를 앞뒤로 포위 습격해 일시 점령하고 주위의 전선을 끊어 사방의 연락을 차단한 다음 구월산 아래 남부면 개원리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다른 1대는 친일군수 최병혁을 사살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군은 대대적인 수색작업에 나섰다. 이명서는 9월 초 신천군 초리면 도명리로 들어가서 임시 거처를 만들고 은밀히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9월 10일, 산 아래에서 연락을 취하던 우종서(禹鍾瑞)가 일본경찰에 속아 위치를 누설해 일본경찰에게 포위당하였다. 이에 다수의 적군과의 전투 끝에 이근영·박기수·주의환·이지표·원사현(元士賢) 등과 함께 전사하였고, 나머지 동지 민양기·고두환·박지영 등은 중상을 입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2·5·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1973·1978)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1967)
『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백범일지』(금구, 광명출판사,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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