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발족되었으며, 발기인은 김구 · 여운형 이외에 조상섭(趙尙燮) · 김인전(金仁全) · 이유필(李裕弼) · 손정도(孫貞道) · 양기하(梁基瑕) · 박은식(朴殷植) · 한태규(韓泰珪) · 김홍서(金弘敍) · 김현구(金鉉九) · 박걸(朴傑) · 이용재(李龍宰) · 김두만(金斗滿) · 최준(崔濬) · 조동호(趙東祜) 등이었다.
책임 부서로 경리부 · 교육부 · 노공부(勞工部) 등을 두었는데 주요 업적은 ① 1922년 12월 이동건(李東健)을 허베이성(河北省) 한단군사강습소(邯鄲軍事講習所)에 유학, 군사학을 익히게 하였으며, 백설서(白雪瑞)를 북경학생단(北京學生團)에, 주문원(朱文源) · 윤장원(尹章元)을 카이펑(開封) 병공국(兵工局)에 각기 파견, 중화학기술을 습득하게 하였다.
② 1923년 1월에는 공국선(孔國宣)을 북경학생단에, 정진국(鄭鎭國)을 한단군사강습소에 유학, 군사학을 습득하게 하였다. ③ 1923년 5월 6일 제9회 이사회에서는 여운형을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에 있는 장군 우페이푸(吳佩孚)를 방문하게 하여 장교와 공병양성을 협의하도록 결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④ 1924년 6월에는 최천우(崔天祐) · 채군선(蔡君仙) · 박희곤(朴熙坤)을 뤄양학생단에 유학시켜 군사교육을 받도록 뒷받침하였다. ⑤ 1924년말까지 유학생 13명을 군사교육처에 파견하여 공국선 · 백설서 등으로 하여금 교육을 마치고 상해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군자금 중국 원화(元貨)로 369원을 주선하였다.
⑥ 1927년에는 군관학교지원자 모집과 한국노병회의 대외적인 선전을 위해, 남북 만주 각처에 파견원을 보내어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그러나 정국의 혼란과 유일당운동의 확대 보급, 그리고 윤기섭(尹琦燮) 등의 탈퇴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래 10년 동안의 존속을 목표로 활동하였으므로 10년이 되는 1932년에는 성과를 거두고 자동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