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양기하(梁基河)·양인원(梁仁元)·임창주(林昌周). 호는 하산(荷山). 충청남도 논산 출신.
한말에 공주군수를 역임하다가 1910년 국권상실 후 공직을 사퇴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 유하현(柳河縣)에서 박장호(朴長浩)·조병준(趙秉準)·백삼규(白三圭) 등과 교민들의 애국교육사업에 주력하였으며, 3·1운동 이후 동지들과 같이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여 교통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광복군사령부가 결성되자 정보국장으로 활약하였고, 1922년 중국 상해로 가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발기, 조직하여 군사력 배양에 힘썼다. 1927년 임시정부 군무부 직할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의 교육위원장 겸 제3행정구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29년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통합기구인 국민부(國民府)가 결성되자 지방부집행위원 겸 중앙사판소장(中央査判所長)이 되었으며, 1931년 조선혁명당의 정치부위원장이 되었다.
1932년 초산경찰서 경찰대와 관전현(寬甸縣)의 만주국군의 협공을 받고 소속 독립군을 지휘하여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29명의 동지와 함께 전사하였다.
196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