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수봉(秀峰). 평안북도 의주 출신.
1919년 4월 2일 수진면 고향에서 3·1운동을 주도한 뒤 동지들과 같이 동삼성으로 망명하여, 만주 안동현(安東縣: 지금의 丹東市)에 설립된 독립운동단체인 임시의사회(臨時議事會)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김두만은 관전현(寬甸縣)을 근거지로 하여 압록강변 8개군의 교통국장으로 있으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교통통신의 임무를 맡아 정보교환, 군자금전달, 독립운동의 방향모색 등의 활약을 하였다.
1920년 대한청년단연합회의 교제부장 및 평안북도 독판부(督辦府) 교통국장 등으로 종사하였다. 1921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조덕진(趙德津) 등 임시의정원의원 11명의 연서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 이승만탄핵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바 있다.
1922년 10월 7일 김구(金九) 등과 같이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기초위원 선정에 참여하여 한국노병회의 회원이 되어, 임시정부를 외곽에서 지원하였다.
1924년에는 광복군참리부(光復軍參理部)의 외무사장(外務司長)에 취임하였으나 얼마 안 있어 사임하였다. 1926년 3월 10일 한국노병회 제20회 정기이사회에서 2년 이상 회비를 납부하지 않아 이 회의 회칙에 의거, 만장일치로 제명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