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6월경 일본과의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중견이 될 장교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이동휘(李東輝, 1873∼1935)와 이종호(李鍾浩, 1885∼1932), 장기영(張基永) 등이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만주의 국경지대인 왕청현에 설립하였다.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은 이동휘와 장기영은 1915년 4월 발기하여 이종호가 제공한 자금으로 6월에 학교를 열었다. 다만 중국 당국이 한인의 민족 교육을 중국 체제에 편입시켜 통제하려고 반포한 <획일간민교육변법(劃一墾民敎育辨法)>에 따라 외부적으로는 ‘왕청현 제1고등국민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학교 건물과 기숙사의 건축은 주민들이 담당하였고, 학교유지경비는 이종호가 맡았다. 장기영이 교관 모집과 교과서 수집을 담당하였고, 김규면(金圭冕), 전일(全一), 조응순(趙應順) 등이 학생을 모집하였다. 나자구의 태흥서숙 학생들과 남북만주, 훈춘, 연해주에서 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처음에는 학생수가 70명이었으나 1916년 1월말경에는 80명이 재학하였다. 설립 당시 연길도윤의 재정 지원을 받았고 이종호가 1천루블, 이재휘(李在輝)가 노령(露領)에서 모금한 4백루블을 제공하였다. 교사들은 무보수였고 교원 및 생도의 의식(衣食)은 학교에서 지급하였다. 중국지방 육군부대에서 기증한 장총 10자루와 중국 운남 강무당의 한운용(韓雲用)과 이용(李鏞) 등이 보낸 중국어판 군사학 교재를 교과서로 활용하였다. 1916년 1월말 당시 교장은 중국인 양환장(王換長)이었고, 교사는 오영선(吳永善), 김성남(金星南), 고경재(高慶宰), 장기영이었다. 총무는 이동휘가 맡았고, 위원은 전의근(전명운)과 지건(池健) 등이었다.
동림학교 출신들은 임국정, 맹훈, 임병극, 윤동섭, 나성학, 방국춘, 김원, 최봉설, 조훈 등이었는데, 이들은 후일 만주와 러시아 지역의 독립군 운동과 항일혁명운동에서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처음에 자금을 제공했던 이종호의 재정 지원이 계속되지 못하면서 이동휘와 이종호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그 뒤 월 7백루블이 소요되는 학교운영비 마련을 위해 창립자 이동휘는 자금 조달에 힘썼으나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여 1916년 3월경 일시 폐쇄되었다. 이후 노령으로부터 3천루블의 모금을 전달받은 김립(金立)과 윤해(尹海)의 노력으로 5월경 다시 개교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자금난과 간도주재 일본영사관의 압력으로 무기휴교상태에 들어가 사실상 폐쇄되었다. 사관후보생 가운데 40여 명은 제1차세계대전 발발 이후 노동자를 대거 모집하였던 러시아 우랄 지방의 벨림이대공장으로 가서 노임을 받아 학업을 계속하자는 맹약을 맺고 떠났다. 나머지 학생과 교사들은 오영선을 따라 훈춘 대황구(大荒溝)로 가서 동림무관학교의 후신인 북일학교(北一學校) 설립에 참여하였다.
동림무관학교는 독립군을 지휘할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한 북간도 지역의 대표적인 무관학교였다. 러시아에서 조직된 대한광복군 정부는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1914년에 제2의 러일전쟁이 발발할 것에 대비하여, 이동휘, 이상설(李相卨, 1870∼1917), 이종호, 정재관(鄭在寬, 1880∼1930), 이동녕(李東寧, 1869∼1940) 등이 조직한 군정부로, 노령을 제1군구, 북간도를 제2군구, 서간도를 제3군구로 나누었다. 군 통제권은 정도령이 맡았는데, 이상설이 제1대 정도령, 이동휘가 제2대 정도령에 선임되었다. 이 학교는 대한광복군 정부의 독립전쟁 수행계획의 일환으로 조직된 것으로, 중도에 폐쇄되었지만 1920년대 북간도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사관양성소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가 추진했던 명월구(明月溝) 무관학교의 선구가 되었다. 이 학교의 졸업생들은 노령과 중령의 ‘위국헌신(爲國獻身)하는 청년들’로서 3·1운동 이후 만주와 러시아 지역에서 조직된 독립군 부대들의 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