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동욱(東郁), 호는 화산(華山). 평안남도 안주 출신이다.
1917년 만주 유하현(柳河縣)의 삼원보(三源堡)로 가서 이탁(李沰)·김동삼(金東三) 등과 교유하고, 부민단(扶民團)에 입단하여 이주 동포의 자활과 교육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18년 10월 고향인 안주로 돌아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삼원보로 건너가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고 평안남도 토벌 대장에 임명되어 대원들을 파견하여 일본경찰주재소와 각 관청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그 해 5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0년 일본군의 만주 출동으로 활동의 제약을 받게 되자 다시 귀국하여, 창성·삭주 등지의 일본기관을 습격하고 많은 일본 경찰을 사살하였다.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에 의해 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 기밀경감(機密警監)에 피임되었으며, 1922년 환인현(桓仁縣)에서 결성된 통의부(統義府)의 제5중대 독립 소대장이 되어 동포 자녀의 교육과 군사 훈련에 힘썼다.
1923년 도강두(渡江頭)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적 11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1924년 7월 강계 사서면(史西面)에서 일본수비대에게 3중 포위되어 항전하다가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1925년 참의부(參議府) 경무원(警務員)이 되었으며, 1926년 금천현(金川縣)에 200여 호의 농장을 개설하고 동포 자녀의 교육을 위해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1928년 조선혁명당의 지방책임위원이 되었으며, 1929년 지방순회차 해룡현(海龍縣)에 이르렀을 때 일본영사관에 매수되었던 중국 경찰의 급습을 받고 붙잡혀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출옥하였다.
1937년 4월 한중연합토일군(韓中聯合討日軍)의 참모가 되어 일본관청을 습격하는 등 맹활약을 벌어 나갔으나, 그 해 9월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온갖 고문과 악형을 받다가 만주 경찰로 넘겨진 후 석방되었다.
1945년 일본 경찰의 무조건 구속으로 해룡현 감옥에 있다가 조국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남만주지구 한국인해방연합회 보안 부장에 피선, 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다가 1947년에 귀국하였다. 1949년 국민훈련원을 수료하고 농촌건설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