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항일기에 서울에서 발간된 지하신문의 하나로, 1919년 3월 1일 서울 수송동 소재 천도교계의 보성사(普成社)에서 창간하였다.
이 신문의 중요 부서는 3·1운동의 핵이었던 천도교의 지도자들이 맡았는데, 사장 윤익선(尹益善), 편집 이종린(李鍾麟)이었고, 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鍾一)과 감독이던 김홍규(金弘奎) 등의 공동 책임 아래 3월 1일 오전에 창간호 1만 부를 배포하였다. 제호는 초호 활자를 넣고 기사는 4호, 제목은 1호 활자를 썼다.
크기는 보통 신문지의 4분의 1 정도였다. 기사의 내용은 세 가지로 되어 있었는데, 첫째는 3·1운동에 있어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泰和館)에서 3월 1일 하오 2시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민족대표들의 순국결사(殉國決死)의 뜻을 밝혔으며, 셋째는 독립운동이 적극적으로 확대될 것임을 전망하는 내용이었다.
33인의 한 사람인 이종일은 태화관에서 일본경찰에 잡혔고, 윤익선은 그날 하오 6시에 붙잡혔으며, 보성사는 폐쇄당하였다. 이 때 이종린은 몸을 피하여 서울 관훈동 경성서적조합 사무소에서 장종건(張琮健)과 상의하여 등사판 신문을 계속 발행하기로 결정하고 제2∼4호까지 프린트판으로 발간하였다.
그러나 3월 10일 이종린도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자 장종건은 광화문통에 있는 유병윤의 집으로 옮겨 계속 제6호까지 발행하였다. 그리고 다시 공덕동의 남정훈의 집으로 옮겼으나 25일 장종건마저 일본 경찰에 붙잡힘으로써 발행 후계자가 끊어졌다.
그러나 제9호부터는 무명의 후계자들이 계속 나타나 발행하다가 계속 잡혀가는 등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3월 21일자 제16∼24호는 역시 관훈동에서 김일선(金一善) · 장채국(張彩國) · 장용하(張龍河) 등이 발간, 배포하였다.
이 밖에 강매(康邁) · 김유인(金裕寅) · 이용설(李容卨) · 이철(李鐵) · 김옥영(金玉英)과 각급 학생 등도 원고작성, 등사 및 발행 · 반포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 후에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여 6월 22일까지 제36호를 발간하였고, 8월 20일에는 제42호를, 8월 29일에는 국치(國恥) 특집호도 내놓았다.
이 신문이 몇 호까지 발행되었는지, 언제 중단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20년 새로운 민간지의 발간이 허용되었던 시기 전까지 계속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