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장연 출신. 천도교교도이며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교장으로 있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 이종일(李鍾一)과 협의하여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어 1만부를 보성사(普成社)에서 인쇄하여 3월 1일 전국에 배포하였다. 『조선독립신문』은 3·1운동 때 발행된 수많은 지하신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19년 4월 조선국민대회(朝鮮國民大會)와 조선자주당(朝鮮自主黨)의 연합회 이름으로 포고된 조선민국임시정부(朝鮮民國臨時政府)조직 포고문에는 조선민국임시정부의 법무경으로 지명되었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북간도 용정촌 토성보(龍井村 土城堡)의 동흥학교(東興學校) 교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애국적 인재를 길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2018년 서훈이 취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