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은 여조현(呂祖鉉·呂肇鉉). 호는 시당(時堂). 경기도 용인 출신.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북간도로 건너가 이동녕(李東寧)·이상설(李相卨)과 함께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워 후진 교육에 힘썼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는 고종의 특사 이준(李儁)을 안내하여 간도에서 이상설을 만나게 하였다. 1912년 가을 통화현 합니하(通化縣哈泥河)로 옮겨 허혁(許赫)과 함께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해 이주 동포의 자활과 교육을 맡아 보았다.
또한 신흥학교(新興學校)의 유지·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이탁(李鐸) 등과 신흥학교 유지회를 조직하여 독립군 양성을 시도하였다. 1913년부터 신흥학교 교장이 되어 학교를 키우는 데 힘을 쏟았다.
1919년 봄 국외에 있던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이상룡(李相龍) 등 39인과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또한, 남만주교포 이름으로 만국평화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으며, 당시 서간도의 부민단·자신계(自新契)·교육회의 3단체를 통합, 조직한 한족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한족회(韓族會)의 산하 기관인 신흥학교를 통해 독립군 간부 양성에도 힘썼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인가를 얻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설립, 부독판(副督辦)으로 서간도 지방의 모든 독립운동을 통제, 주도하였다.
1920년 12월 임시정부 간서총판부(間西總辦部)를 설치하여 총판에 취임하였으며, 1921년에는 재만학생교과서편찬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다.
1922년 액목현(額穆縣)에 검성중학(儉城中學)을 설립하여 교장으로서 인재 양성에 힘썼고, 1930년 1월에는 김구(金九)를 비롯한 이동녕·지청천(池靑天)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재결성하여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때 일본군과 싸우다가 후퇴하는 중국군에게 모진 매를 맞고, 장백산록(長白山麓)에서 요양하던 중 숨졌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