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박해사(朴海史). 경상북도 영덕 출신.
1913년 10월 만주 통화현(通化縣) 김두하락(金斗河洛)에서 독립운동단체 경학사(耕學社)의 후신인 부민단(扶民團)을 발전시켰다.
다음 해 4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한족회(韓族會)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군자금모금 등을 전개하였다. 1916년 3월 일본경찰의 밀정 유길선(柳吉善)을 통화현 이도구(二道溝)에서 독립단(獨立團)의 한치응(韓致應)·박응서(朴應瑞)와 같이 사살, 제거하였다.
1919년 11월 각지의 임시정부가 통합된 뒤 실시한 국내 각 지방의 유지·재산가·학교·종교상황의 실태조사원으로 임명되어 주로 경상북도 의성군 일대의 현황을 조사, 보고하였다. 1920년 5월 활동중 일본경찰에 붙잡혀 사형이 확정되었다.
형장(刑場)으로 압송 도중 김자선(金子善: 일본군 임시통역인)과 동생 박세진(朴世鎭)·박명진(朴明鎭) 등의 합세로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 뒤 다시 동삼성으로 탈출하여 1927년 3월 신숙(申肅)과 독립촉성회(獨立促成會)를 결성하기 위하여 전만대표자회의(全滿代表者會議)를 길림(吉林)에서 소집하기로 결정한 뒤 북만대표(北滿代表)로 참석하여 계속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