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영 ()

성암집
성암집
유교
인물
일제강점기 「사상강설(四上講說)」, 『내범요람(內範要覽)』 등을 저술한 학자. 항일운동가.
이칭
계형(季衡)
성암(醒菴)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7년(고종 4)
사망 연도
1919년
본관
경주(慶州)
출생지
공주
정의
일제강점기 「사상강설(四上講說)」, 『내범요람(內範要覽)』 등을 저술한 학자. 항일운동가.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형(季衡). 호는 성암(醒菴). 아버지는 이홍제(李弘濟), 어머니는 상산 박씨(商山朴氏) 통덕랑(通德郞) 박용원(朴龍遠)의 딸이다. 공주(公州) 중호(中湖)에서 출생했고, 유대원(柳大源)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4년 왜인(倭人)들이 철도 부설(鐵道敷說)을 서둘러 공주(公州)에 있는 선영(先瑩)을 침범하게 되자, 유림(儒林)의 진정서(陳情書)를 갖고 관계자를 찾아가 항의 이동(移動)하게 하였다. 다음 해 이유태(李惟泰)의 『사서답문(四書答問)』을 교정 발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 체결되자 기의려문(起義旅文)을 지어 거사(擧事)하려다가 실패하였다. 1908년 돈암서원(遯菴書院)과 부여향교(夫餘鄕校)에서 신학문을 가르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각각 편지로 부당함을 전했다.

다음 해 왜인(倭人)들이 고종(高宗)의 칙명이라며 국민의 호적(戶籍)을 만들려고 하자, 이에 반대해 일본 정부에 장서(長書)를 보내 그들의 간상(奸狀)을 낱낱이 지적하였다. 홍산(鴻山) 경찰서에 이송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14년 다시 부여 왜경주재소(倭警駐在所)에 잡혀가 70여 일 동안 구금되었고, 1918년 호적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시 부여 왜경주재소에 잡혀갔다가 석방되었다. 또한 왜인들의 정령(政令)을 일체 거부했으므로 온갖 고초를 겪고 산판(山坂)을 수탈당하기도 하였다.

이철영은 또한 성리설에 조예가 깊어 당시 고질적 폐단이 되어 온 성리논쟁(性理論爭)에 대해 율곡설(栗谷說)로 미루어 종합 절충론인 「사상강설(四上講說)」을 지어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공주(公州)의 숭의사(崇義祠)에 봉향되었고, 저서로는 『성암집(醒菴集)』 4책과 한글 『내범요람(內範要覽)』 1책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기려수필(騎驪隨筆)』
『성암집(醒菴集)』
관련 미디어 (2)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