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군단의 편성과 설치에 대한 주무(主務)는 하와이 각 지방에서 군사훈련을 추진해 온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연무부(練武部)가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을 주도한 주역 인물은 박용만이었다.
국민군단은 박용만이 1909년 6월 네브라스카 헤스팅스에서 시작한 한인소년병학교의 군사운동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미주한인사회에 항일독립전쟁론을 구현하고자 만든 단체였다. 이에 따라 국민군단의 핵심 사업은 ‘산넘어병학교’라 불리는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설립을 통한 독립군사관 양성이었다.
국민군단과 사관학교 설립에 참여한 주요 인물은 박종수 · 구종곤 · 이호 · 안원규 · 김세은 · 이정권 · 노훈 · 임응천 · 한태경 · 한치운 · 이치영 등이었다.
국민군단의 군사교육 활동은 실제 무기가 아닌 목총으로 실시되었고 운영은 원칙적으로 둔전병제(屯田兵制)로 이루어졌다.
즉, 군단에서 기숙하면서 조를 편성해 농장에 나가 노동을 하면서 훈련과 학습을 받는 방식이었다. 조직은 박용만을 군단장으로, 태병선을 부관으로 하는 군단사령부를 위시해 군단경리부 · 제복소 · 병학교 · 별동대 · 곡호수(曲號手)와 고수(鼓手)로 편제되었다. 사관학교는 ‘병학교’로 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직은 모든 한인의 독립군을 ‘대조선국민군단’으로 편성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편성되었다. 이에 따라 군단사령부의 임원은 그대로 사관학교의 임원이며, 사관학교의 생도는 곧 국민군단의 국민군이었다.
군단과 사관학교의 병력은 120∼300여 명에 달했고 군영 낙성식은 1914년 8월 29일에 이루어졌다.
국민군단과 사관학교는 1916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해 1917년경에는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해체의 중요 원인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일(美日)간의 우호관계가 지속되면서 국민군단의 혁명적 · 군사적 성격이 하와이 내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병농일치의 둔전병제에 기반을 둔 운영이 하와이내 농장의 불경기와 흉작으로 수입이 격감하면서 군영 운영을 위한 재정 조달이 어려웠던 점, 마지막으로 1915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실권이 이승만측에 넘어가 박용만의 활동 범위가 위축된 점을 들 수가 있다.
그러나 국민군단의 상무적(尙武的) 정신은 박용만에 의해 대조선독립단으로 계속 이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