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증 ()

서예
인물
조선 후기, 『곡운집』, 『곡운구곡도첩』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서예가.
이칭
아호
곡운(谷雲)
연지(延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24년
사망 연도
1701년
본관
안동(安東)
출생지
서울
주요 저서
곡운집
주요 작품
곡운구곡도첩
주요 관직
세마|형조 정랑|공조 정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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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김수증은 조선 후기에 『곡운집』, 『곡운구곡도첩』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서예가이다. 전서와 예서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고 공부하여 예서에서 독특한 서풍을 이루었다. 17세기 이후 조선의 정치·문화에 영향력이 컸던 안동 김씨 출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이 그의 아우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 일찍 물러나 강원도 화천에서 은거하였고, 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이 추구한 은거의 주요 모델이 되었다.

정의
조선 후기, 『곡운집』, 『곡운구곡도첩』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서예가.
가계 및 인적사항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이다. 김광찬(金光燦)의 아들,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며,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이 그의 아우다. 1650년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675년에 벼슬살이를 마감하고 은거에 들어갔다. 송시열과 사우의 관계를 맺고 평생 그 관계를 유지했다. 조카들인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등 후학들에게 영향을 크게 미쳤다.

주요 활동

주희와 이이의 은거 방식을 본받아 화천의 협곡을 곡운구곡이라고 명명하고, 인근 화악산 아래에서 도학에 정진하며 은거 생활을 유지하였다. 1682년에는 화가 조세걸(曺世傑)을 화천으로 초빙하여 곡운구곡을 그리게 하고, 자제들의 시를 모아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을 만든 후 스스로 그 표제 글씨를 썼다. 송시열과 함께 당시 주요 인물들의 묘갈명을 썼다.

그는 1673년에 쓴 예서에 관한 발문에서 금석 자료를 이용한 예서와 전서 학습이 중요함을 지적하여,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금석학을 기반으로 한 서예 학습과 창작의 경향에 영향을 주었다. 17세기 후기에 세워진 비갈 중에는 그가 글씨를 맡은 것들이 다수인데, 그 자형은 정방형에 가깝고 획에는 굵기의 변화가 없으며 붓끝이 한쪽으로 치우치지만 후한 시대 예서처럼 율동감이나 화려한 자태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에 말미암아 그의 예서는 단조로운 형태, 부드러운 붓질이 주된 해서의 필법으로 정리할 수 있으며, 18세기 조선의 예서와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곡운집(谷雲集)』[6권 3책]이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곡운집(谷雲集)』

단행본

『곡운구곡: 화천에서 찾은 은자의 이상향』(국립춘천박물관, 2021)

논문

조규희, 「《곡운구곡도첩》의 다층적 의미」(『미술사논단』 23, 한국미술연구소, 2006)
이완우, 「곡운 김수증의 예서」(『미술사학보』 12, 미술사학연구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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