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와 이이의 은거 방식을 본받아 화천의 협곡을 곡운구곡이라고 명명하고, 인근 화악산 아래에서 도학에 정진하며 은거 생활을 유지하였다. 1682년에는 화가 조세걸(曺世傑)을 화천으로 초빙하여 곡운구곡을 그리게 하고, 자제들의 시를 모아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을 만든 후 스스로 그 표제 글씨를 썼다. 송시열과 함께 당시 주요 인물들의 묘갈명을 썼다.
그는 1673년에 쓴 예서에 관한 발문에서 금석 자료를 이용한 예서와 전서 학습이 중요함을 지적하여,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금석학을 기반으로 한 서예 학습과 창작의 경향에 영향을 주었다. 17세기 후기에 세워진 비갈 중에는 그가 글씨를 맡은 것들이 다수인데, 그 자형은 정방형에 가깝고 획에는 굵기의 변화가 없으며 붓끝이 한쪽으로 치우치지만 후한 시대 예서처럼 율동감이나 화려한 자태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에 말미암아 그의 예서는 단조로운 형태, 부드러운 붓질이 주된 해서의 필법으로 정리할 수 있으며, 18세기 조선의 예서와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문집으로 『곡운집(谷雲集)』[6권 3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