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희는 평생 일정한 주기로 서울과 해남을 오가며 활동했다. 초년기인 20세까지는 서울에 살면서 윤두서와 옥동(玉洞) 이서(李漵)에게 문예와 학술을 배웠다. 또, 아버지와 친교를 나누었던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에게도 영향을 받은 듯하다. 1713년부터 1731년까지 해남으로 돌아가 보낸 중년기에는 윤두서가 남긴 유고를 정리하면서 본인의 서화 수련에 힘썼다. 1731년부터 1752년까지는 다시 서울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이며 노년기를 보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대부분 이 시기에 제작된 것들이다. 1748년에는 숙종어진중모(肅宗御眞重摹)에 조영석(趙榮祏), 심사정(沈師正)과 함께 감동(監董)을 수행한 공으로 정릉령(貞陵令)을 제수받기도 했다. 1752년에는 다시 낙향하여 사망할 때까지 해남에 머물렀다. 해남에서 보낸 만년기에는 주로 시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종실인 남원군(南原君) 이설(李木+卨), 순의군(順義君) 이훤(李煊), 순제군(順悌君) 이달(李炟) 등과 교유하였고, 이병연(李秉淵), 정선(鄭敾)과 같은 당대의 시인 및 화가들과도 교류하였다.
윤덕희의 회화 작품은 전칭작을 포함하여 115점 정도 전하며, 남종문인화, 진경산수화, 풍속화, 도석인물화, 말 그림 등 화목이 다양하다. 산수화는 전통적인 정형산수를 주로 남겼으며, 송대와 원대, 명 중기의 주1, 청초의 안휘파(安徽派)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넓다. 진경산수화로는 1763년 작 「도담절경도(島潭絶景圖)」가 유일하게 남아 있으나, 그 전인 1747년에 금강산 그림을 그린 바도 있다. 인물화는 도석인물화와 풍속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대개 화보와 같은 참고 자료에 있는 내용을 조선풍으로 번안을 시도한 것들이다. 말 그림의 경우는 윤두서로부터 전수받아 자신의 화풍으로 발전시켰다.
윤덕희는 성리학을 근간으로 삼았지만, 그 외에 불교와 신선사상, 양생술, 의약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음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에 수입된 소설류들을 탐독하여 약 127종의 수입 소설류를 소장하고 있었다.
문집으로는 『수발집(溲勃集)』이 있으며, 금강산 유람을 기록한 『금강유상록(金剛遊賞錄)』, 윤두서의 유작을 모아 엮은 『가전보회(家傳寶繪)』, 『윤씨가보(尹氏家寶)』 등도 전한다. 주요 작품으로는 「동경산수도(冬景山水圖)」[1731],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1731], 「종리권(鍾離權)」[1732], 「마정상도(馬丁像圖)」[1736], 「마상부인도(馬上婦人圖)」[1736], 「남극노인도(南極老人圖)」[1739], 「별리산수도(別離山水圖)」[174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