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관 ()

숭절사삼충록
숭절사삼충록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판서, 수원부유수,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유숙(裕叔)
가정(柯汀)
시호
효문(孝文)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39년(영조 15)
사망 연도
1808년(순조 8)
본관
풍양(豊壤)
주요 관직
판서|수원부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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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판서, 수원부유수,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유숙(裕叔), 호는 가정(柯汀). 아버지는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들여와 재배한 이조판서 조엄(趙曮)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62년(영조 38) 사마시에 합격하고, 1771년 의금부도사에 피임되었다. 그 뒤 1775년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으로 있을 때 특별 구현시(求賢試)에 장원으로 뽑혀 홍문관제학으로 발탁되고, 같은 해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당시 평안도관찰사로 있던 아버지 엄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의 인사문제에 관련, 홍국영(洪國榮) 일당의 무고로 억울하게 죄인의 누명을 쓰자 신문고를 쳐서 부당함을 호소하기도 하고, 옥중에서 자살을 기도하는 등 홍국영의 세도에 항거하였다.

1788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임명된 뒤 한성부우윤·좌윤 등을 지내면서,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기 위한 소를 계속 올려 마침내 1794년 그 원(寃)을 풀고 그 해 대사간이 되었다. 1796년 동지춘추관사에 이어 1798년에 개성 유수로 재직하면서 송상현(宋象賢)·김연광(金鍊光)·유극량(劉克良) 등 세 충신에 관한 글들을 모아 『숭절사삼충록(崇節祠三忠錄)』을 간행하였다. 이후 전라도관찰사·병조판서·선혜청제조 등을 두루 거쳐 1800년(순조 즉위년)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사직소를 계속 올려 사퇴한 뒤 곧 복직되어 대사헌에 임용되었다. 그 뒤 병조·예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805년 호조판서로 있을 때 영동·관서 지방에서 재해를 입은 고을에 대동포(大同布)나 대동삼(大同蔘)의 납부 기간을 연기해주는 한편, 전(錢)으로 대납하게 하거나 분납도 허락해주자고 왕에게 건의, 그대로 시행케 하여 농민의 어려움을 덜어주기도 하였다.

그 뒤 수원부유수를 거쳐 판돈녕부사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글씨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문집으로 『가정유고(柯汀遺稿)』가 있으며, 역학서로 『역문(易問)』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풍고집(楓皐集)』
『운석유고(雲石遺稿)』
『한국고사대전』(김순동, 회상사, 1965)
관련 미디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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