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유숙(裕叔), 호는 가정(柯汀). 아버지는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들여와 재배한 이조판서 조엄(趙曮)이다.
1762년(영조 38) 사마시에 합격하고, 1771년 의금부도사에 피임되었다. 그 뒤 1775년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으로 있을 때 특별 구현시(求賢試)에 장원으로 뽑혀 홍문관제학으로 발탁되고, 같은 해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당시 평안도관찰사로 있던 아버지 엄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의 인사문제에 관련, 홍국영(洪國榮) 일당의 무고로 억울하게 죄인의 누명을 쓰자 신문고를 쳐서 부당함을 호소하기도 하고, 옥중에서 자살을 기도하는 등 홍국영의 세도에 항거하였다.
1788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임명된 뒤 한성부우윤·좌윤 등을 지내면서,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기 위한 소를 계속 올려 마침내 1794년 그 원(寃)을 풀고 그 해 대사간이 되었다. 1796년 동지춘추관사에 이어 1798년에 개성 유수로 재직하면서 송상현(宋象賢)·김연광(金鍊光)·유극량(劉克良) 등 세 충신에 관한 글들을 모아 『숭절사삼충록(崇節祠三忠錄)』을 간행하였다. 이후 전라도관찰사·병조판서·선혜청제조 등을 두루 거쳐 1800년(순조 즉위년)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사직소를 계속 올려 사퇴한 뒤 곧 복직되어 대사헌에 임용되었다. 그 뒤 병조·예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805년 호조판서로 있을 때 영동·관서 지방에서 재해를 입은 고을에 대동포(大同布)나 대동삼(大同蔘)의 납부 기간을 연기해주는 한편, 전(錢)으로 대납하게 하거나 분납도 허락해주자고 왕에게 건의, 그대로 시행케 하여 농민의 어려움을 덜어주기도 하였다.
그 뒤 수원부유수를 거쳐 판돈녕부사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글씨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문집으로 『가정유고(柯汀遺稿)』가 있으며, 역학서로 『역문(易問)』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