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진(景進), 호는 희곡(希谷).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이여(廣平大君 李璵)의 후손이며, 이현응(李顯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명중(李明中)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 이의열(李義悅)이며, 어머니는 판중추부사 홍억(洪憶)의 딸이다.
1805년(순조 5) 진사가 되고,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06년에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보직되었다. 1808년 병조좌랑에 이어 지평, 이듬 해 예조참판을 거쳐 1823년 공시당상(貢市堂上)·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지방 수령으로 민폐를 없애기 위해 전부(田賦)를 전(錢)으로 대신할 것, 그리고 호적의 법규 개정과 공염(公鹽)의 밀거래 단속 등을 청하였다.
1827년 한성판윤·평시서제조(平市署提調)·예조판서·광주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1834년 호조판서가 되어 공인(貢人) 방납의 폐단을 바로잡았다. 1837년(헌종 3)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실록청의 총재관이 되어 『순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영의정 이상황(李相璜), 좌의정 박종훈(朴宗薰)이 사직하자 홀로 상신(相臣)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적(糶糴 : 환곡의 방출과 수납)을 고르게 하고, 연화(燕貨 : 청의 화폐)를 금하며, 전정(田政)을 바로잡을 것 등을 건의하였다.
조대비(趙大妃)의 측근자로서 1839년에 사교 금지를 주장해 앵베르(Imbert,L.M.J.)·모방(Maubant,P.)·샤스탕(Chastan,J.) 등 프랑스 신부를 비롯한 많은 천주교인을 학살한 기해박해를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다. 1840년 대사간 이재학(李在鶴), 대사헌 이의준(李義準) 등이 정권을 마음대로 했다고 탄핵해 함경북도 명천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용모가 뛰어나고 마음이 곧고 신의가 있었으며, 뜻이 깊고 생각이 원대했다 한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저서로는 『희곡유고』, 편서로는『장의공자손보(章懿公子孫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