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1592년(선조 25) 6월 왕명을 받아 조선을 돕기 위해 온 명나라 군대를 응접하는 업무를 전담하였다. 심유경(沈惟敬)을 비롯한 명나라 군대가 통과하는 평안도 큰 고을에서 모든 일이 소홀하고 늦어지는 것이 있을까 염려하여 류성룡은 직접 현지를 점검하면서 정주, 안주 등 지역을 왔다 갔다 하였다. 『서애집』에 실려 있는 진시무차(陳時務箚)는 ‘임진 11월 정주에서’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차자 초고 역시 이때 적은 것이라고 본다. 2012년 5월 17일에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부산광역시 박물관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세로 39.2㎝, 가로 311.8㎝ 크기의 한지에 붓글씨로 쓴 고문서다. 9장의 한지를 가로로 이은 두루마리 형태에 세로로 116줄의 초서(반초서)로 쓰여 있다. 첫째 장은 앞부분이 잘렸고, 아홉째 장은 끝 부분의 뒷면 글씨가 잘렸다. 다섯 째, 여섯 째 장은 길이가 다른 것에 비해 좁고 종이 질이 다르며, 글씨 색도 다르고, 내용도 수정 보완한 것이 있어서 다시 써서 이어 붙인 것으로 짐작된다. 1633년(인조 11)에 간행된 『서애집(西厓集)』의 「권5, 차(箚)」에 「진시무차 임진 십일월 재정주(陳時務箚 壬辰十一月 在定州)」라는 차자(箚子)가 실려 있다. 이 차자의 초고에 해당하는 고문서다.
진시무차 초고의 내용 가운데 중요한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이 급히 원병을 보내지 않아 전쟁이 확대되었으며, 순안에서 용천까지 각 지역에 비축한 양곡이 왜병에게 빼앗기거나 헛되이 소모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사정을 중국 장수에게 전달하여 군정(軍情)을 통일해야 된다.
둘째, 국가의 위기를 구하는 희망을 인심(人心)이므로, 군공 · 작상(爵賞) · 면천(免賤) · 면역 등 규정을 만들고, 군대와 민간인이 왜적을 잡아 얻은 것은 당사자에게 지급하는 등 방안을 마련하여 민심을 수습하면 적의 형세는 약해질 것이다.
셋째, 강원도에서 사냥을 생업으로 하는 산척(山尺)을 상 지급 등 방법으로 모아 복병(伏兵)으로 활용하여 왜병을 토벌하게 하면 북로(北路)로 왕래하는 왜적은 허리 부분이 끊어져서 동남의 형세가 통할 수 있다.
넷째, 서울을 수복하는 방법은 3개의 진로로 나누어서 동쪽, 서쪽, 남쪽을 차단한 후, 적이 적으면 군대를 나눠 복병을 설치하고, 적이 많으면 합하여 공격 토벌하며, 의병과 관군이 합력해야 한다. 강원도 군대는 동쪽, 강화의 의병은 서쪽, 충청 · 전라도 군대는 남쪽 군대와 합세하도록 한다.
다섯째, 경상도는 적병의 집결 지역이므로, 경상도 인심을 결집시켜 적을 토벌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경상도가 흉년이 들어 민심이 불안하므로, 풍년이 든 전라도 곡식을 운반하여 경상도를 구제해야 한다.
여섯째, 정예 군사를 뽑아 왜병으로 가장하게 하고 우리 편은 서로 알 수 있게 한 후, 각 지역에 흩어져 유격전을 펼치는 것이 왜적을 물리치는 최상의 계책이다.
일곱째, 고언백(高彦伯)은 국가를 위하는 마음이 있고 계획도 있으나 직책이 낮아서 양주 한 고을 군대만 관장할 뿐이니, 평시 규정에 구애받지 말고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이 자료는 서애 류성룡이 1592년(선조 25) 11월 정주에서 나라의 시급한 정무에 대하여 올린 차자인 「진시무차」의 초고로 임진왜란 당시 위정자의 시국관과 국난극복의 의지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임진왜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초고는『서애집』에 최종 수록된 「진시무차」와는 상당 부분 동일한 내용이지만, 양자 간에 송언신(宋言愼)의 면직 등 내용상에서 서로 첨삭된 부분이 있어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초고 작성 후에 발생한 변동 사항을 『서애집』에 실린 「진시무차」에 첨가하였기 때문이다. 이 초고는 유일본으로 사료적 가치가 뛰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