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길(景吉), 호는 성재(成齋)·우당(羽堂). 조경(趙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진명(趙鎭明)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조득영(趙得永)이다. 어머니는 이문원(李文源)의 딸이다.
1822년(순조 2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교리를 거쳐 1827년 암행어사가 되었다. 그 뒤 조만영(趙萬永)·조인영(趙寅永)·조병구(趙秉龜) 등과 함께 풍양 조씨 세도정치의 중심 인물이 되어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권력 다툼을 벌이는 데 앞장섰다. 1832년 세자시강원의 겸보덕(兼輔德), 이듬해에는 공충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838년(헌종 4) 예조판서에 올랐다.
다음 해 병조판서·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 때 그는 안동 김씨를 배척하였던 실권자로서 천주교를 탄압, 앵베르(Imbert, 范世享)주교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 등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을 살육하는 기해박해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840년에는 호조판서로 전임하여 『동문휘고(同文彙考)』 편찬 때 교정당상(校正堂上)을 겸하였다.
그 뒤 이조판서·판의금부사를 거쳐 1844년 좌참찬에 올랐다가 과거부정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 뒤 병조판서·규장각제학·예조판서·홍문관대제학 등을 지내고, 1847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다. 이 해 안동김씨파의 정언 윤행복(尹行福), 대사헌 이목연(李穆淵) 등의 탄핵상소를 받아 거제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으나 정언 강한혁(姜漢赫), 대사헌 이경재(李景在) 등의 탄핵을 받았으며 1849년 6월 철종의 즉위로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하자 다시 전라남도지도(智島)에 위리안치되었다가 그 해 9월 사사되었다. 저서로 『성재집(成齋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