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각은 나무·돌·금옥 등에 전자로 인장(도장)을 제작하는 예술이다. 그 방법에 따라 치인·철필·각인·각도장 등으로 부르고 있다. 옥을 쪼거나 돌에 새기거나 대에 새기거나 구리에 새기는 것을 전각이라 하였다. 중국 진시황 때 서체를 정리하면서 전서가 인장의 글자체로 사용되었다. 인면의 전서는 순수한 선조(필라멘트)를 위주로 한다. 필획은 평균적·정제적이고 결구는 대칭적·조화적이어야 한다. 여기에 조각 기교가 더해지면 인장을 서화에 찍었을 때 잘 어우러져 빛나게 된다. 또 독특한 예술품으로 감상할 가치도 지니게 된다.
전각은 일종의 인장을 제작하는 예술이다. 그 방법에 따라 일명 치인(治印) · 철필(鐵筆) · 철서(鐵書) · 각인(刻印) · 각도장(刻圖章) 등으로 부르고 있다.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다름에 따라 문자의 함축된 힘은 사람의 여러 가지 풍모를 움직이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인면 안의 생생한 자태도 일종의 정취가 있고 또 이치가 있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작은 방촌(方寸) 안에 시간적인 고박(古樸)함과 공간적인 혼후(渾厚)함을 꽉 차게 하여 부드러운 광택을 느끼게 한다. 그리하여 고아한 운취를 감상할 수 있는 맛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 곧 전각 예술이다.
전각의 ‘전(篆)’자는 원래 ‘瑑’으로 썼고, 이것은 옥(玉)이나 돌 위에 올록볼록한 화문(花文)을 쪼고 새기는 것을 말한다. 이로부터 죽백(竹帛:책, 특히 史書)이 서사(書寫)하는 공구(工具)가 되어 ‘玉’을 ‘竹’으로 고쳐 쓰게 되었다. 곧 고대의 옥을 쪼거나, 돌에 새기거나, 대에 새기거나〔鑄竹〕, 구리에 새기는〔銘銅〕 것을 ‘전각’이라 한다. 옥새나 도장의 제작은 다만 그 중의 조그마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진시황 때 서체를 정리함에 팔체(八體)로 나누되 인면상의 문자를 ‘모인전(幕印篆)’이라 부르고, 신망(新莽)이 육서(六書)를 정함에 ‘무전(繆篆)’이라 일컬었다. 이로부터 ‘전서’가 인장(印章) 인문으로 사용 자체가 되었다. 당송(唐宋) 때 문인묵객들에 의하여 인장의 체제가 달라지게 되었으며, 명청(明淸)으로 내려오면서 인인(印人), 즉 전각가(篆刻家)가 배출되어, 전각은 전서에 기초를 두고 조각방법을 이용하여 인면에 소밀(疏密)의 표현과 필치의 신운(神韻)을 위주로 하는 예술형태를 갖추어, 전각은 도리어 협의의 치인(治印)의 학(學)으로 되었다.
‘전각’과 ‘금석(金石)’의 경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금석학은 역대 금석의 명의(名義) · 형식 · 제도 · 연혁 및 새겨진 문자도상(文字圖像)의 체례(體例) · 작풍(作風)을 연구하되, 위로는 경사고정(經史考訂)과 문장의례(文章義例)를, 아래로는 예술감상에 이르는 학문이다. 금석학은 곧 길금낙석(吉金樂石)을 연구하는 것이 주이고, 예술감상은 버금인 고고학임을 알 수 있어, 전각이 예술감상을 위주로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그러나 금석학을 연구하는 금석가는 반드시 각인(刻印)을 이해하지 아니하여도 되지만, 전각가는 일정한 금석학을 이해하여야만 된다. 그 까닭은 전각을 배우는 과정에서 일반 서법을 익힐 때 반드시 전서에 정통하여야 하고 그 가운데 ‘길금낙석’의 문자를 섭렵하여야 비로소 각종 전서에 체회(體會)할 수 있다. 따라서 전각가라면 곧 금석가가 되어야 하지만 금석가는 전각에 능통하여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전각에 있어서 금석학은 필수이고, 따라서 서법이 그 기초이기에 여기에 조각적 기술을 합쳐서 방촌의 범위 안에 잘 안배하여야 하는 문자의 예술성을 극치로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인면의 문자는 전서로서 순수한 선조(線條:필라멘트)를 위주로 하되 필획은 평균적 · 정제적(整齊的)이며, 결구(結構)는 대칭적 · 조화적이라야 한다. 그러면서 굴신(屈伸:굽힘과 폄)은 마음대로 하되 증감 또한 합법적이고 서로 사양함이 차가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분백포주(分白布朱)하는 교묘함과 조각 기교가 아울러서 이루어지는데 각종의 같지 아니한 의경(意境)과 풍신(風神)이 나타나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서화와 서로 어울려서 빛나고 또 독특한 예술품으로 흔상할 가치를 지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