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습인

  • 역사
  • 인물
  • 고려 후기
고려 후기에, 성균학관, 지영주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현숙(顯叔)
인물/전통 인물
  • 본관초계(草溪)
  • 사망 연도미상
  • 성별남성
  • 주요 관직지영주(知榮州)
  • 출생 연도미상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박천식 (전북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고려 후기에, 성균학관, 지영주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현숙(顯叔). 증조는 국자박사(國子博士) 정승방(鄭丞邦)이고, 조부는 국자진사(國子進士) 정방주(鄭邦柱)이며, 아버지는 국자진사 정공연(鄭公衍)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학관(成均學官)에 보임되었고, 이어 지영주(知榮州)가 되어 일을 보려 할 때 주리(州吏)가 고사(故事)를 들어 소재도(消灾圖)에 분향하기를 청하므로 “인신(人臣)의 법이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고 하여 이를 철거하였다.

또한, 영주에 무신(無信)이라는 탑이 있었는데, 이를 허물고 그 벽돌로 빈관(賓館)을 수리하여 신돈(辛旽)의 노여움을 사서 계림옥(鷄林獄)에 갇혔다. 신돈이 정습인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조정신하들의 도움으로 죽임을 면하고 평민이 되어 영주에 가서 그 탑을 다시 쌓게 하였다.

신돈이 죽은 뒤에 기용되어 다시 지영주가 되고 또 지밀성(知密城)이 되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지방의 세력가를 누르고 음사(淫祀)를 금하였다. 우왕 때 전교령(典校令)으로 일본 사신에 대한 답례사(答禮使)에 임명되었는데, 일본 사신이 불교를 배척하는 자라 하여 바꾸기를 청하므로 결국 가지 못하였다.

그 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자 여막(廬幕)을 짓고 3년상을 행하는 등 한결같이 주자의 『가례(家禮)』에 따랐다. 공양왕이 즉위하여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제수되었으나 곧 윤구택(尹龜澤)의 고신(告身: 임명장)에 이름을 쓰지 않았다고 하여 외지로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 - 『고려사(高麗史)』

  •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