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 진파리 1호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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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평양직할시 역포구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사신도 · 연꽃무늬 관련 벽화무덤. 횡혈식석실분.
이칭
이칭
장군 고흘의 무덤, 진파리 일호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북한 평양직할시 역포구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사신도 · 연꽃무늬 관련 벽화무덤. 횡혈식석실분.
개설

진파리 1호분은 진파리 고분군에 속하며 근처에 전동명왕릉(傳東明王陵)이 있다. 1941년 일본인에 의한 발굴조사 당시 진파리 4호분과 함께 벽화고분임이 밝혀졌고, 1963년 정식으로 발굴, 보고되었다. 북한 당국은 이 벽화고분을 ‘장군 고흘의 무덤’으로 명명했다. 또한 이 벽화고분은 그 존재가치가 입증되어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41년 조사 당시 널방 내부에서 관모(冠帽) 형태의 금동투조금구(金銅透彫金具)가 출토되었다. 금동투조금구는 중심에 원에 둘러싸인 삼족오(三足烏)와 원 둘레에 3마리의 용과 화염문을 투조한 것인데, 무덤에 뭍힌 주인공이 높은 신분이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벽화의 모사화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내용

진파리 1호분의 봉분의 지름이 약 30m, 널방 바닥에서의 높이가 5m가량이며, 장방형 널방과 널길[羨道]로 구성된 외방무덤[單室墳]으로 널방 방향은 남향이며 납작한 판석(板石)을 이용해 축조하였다. 천장구조는 2단의 평행굄 위에 1단의 삼각굄을 얹은 평행삼각굄이다.

널방 내부에 석회를 바른 뒤 그 위에 벽화를 그렸으며, 벽화의 주제는 사신(四神)이다. 벽화는 널길 좌·우벽과 널방벽 및 천장에 걸쳐 그려졌다. 묵선(墨線)을 주로 하고 몰골법(沒骨法)도 사용하는 등 다양한 필법을 쓰고 있다. 색채는 주색·황색·녹색·자색을 주조로 하였으며, 대상의 표현에 선의 강약과 색의 농담을 적절히 조절해 그에 알맞은 효과를 의도하는 세련된 회화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널길 좌·우벽에는 쌍영총(雙楹塚) 및 통구 사신총(四神塚)과 같은 계열의 수문역사(守門力士)를 그렸다. 연화반(蓮花盤) 위에 서 있고 광배(光背)가 머리 뒤에 표현된 것으로 보아 사천왕(四天王)의 일부를 묘사한 듯하다.

널방 동벽에는 북쪽을 향해 웅비하는 청룡을 묘사하고 배경에는 진파리 4호분 벽화에서와 같이 같은 방향으로 강하게 흐르는 구름, 휘날리는 인동연화(忍冬蓮花), 구름을 타고 나는 서조(瑞鳥) 등을 그렸다. 그러나 진파리 4호분류의 천인(天人)은 보이지 않으며, 구름 및 인동연화의 운동성이 보다 강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서벽의 백호 역시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포효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남벽에는 널방 입구 좌우로 한 쌍의 주작을 묘사하였다. 2마리 주작 모두 꼬리가 위를 향해 뻗어 있는데,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북벽 가운데에는 현무를 배치했으며, 하나로 얽힌 뱀과 거북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동·서벽의 청룡·백호에 비해 고졸한 느낌을 준다. 현무의 좌우에는 암산과 커다란 소나무를 그렸고, 위로는 흐르는 구름과 휘날리는 인동연화 및 화염,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용 등을 묘사하였다.

천장부에는 운문과 인동연화문을 번갈아 그려 장식하였으며, 천장의 네 귀퉁이에 인동연화를, 중심부에 일월상(日月像)을 그려 넣었다. 해모양[日像]은 원 안의 삼족오로 나타낸 것에 비해 달모양[月像]은 원 안에 계수나무와 옥토끼, 두꺼비를 모두 그려 넣어 일반적인 달모양과 차이를 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묘사된 달모양 중 특이한 표현으로 달모양에 대한 관념의 복합으로 말미암은 듯하다.

의의와 평가

진파리 1호분은 널방의 구조, 벽화의 기본적인 구성방식, 벽화에 보이는 육조양식적(六朝樣式的) 요소 등이 진파리 4호분과 같다. 그러나 필선이 보다 세련되고 벽화 중의 수목·산악표현과 같은 새로운 요소, 널방벽에서 사신이 차지하는 비중의 증대 등으로 미루어 진파리 4호분보다 늦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축조시기는 6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 진파리 4호분과 함께 고구려와 중국의 문화교류 내용 및 전형적인 고구려 사신도묘(四神圖墓)의 성립과정을 밝히는 데에 도움을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북한에서는 이 고분의 주인공을 6세기 후반기에 활약한 고흘 장군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근거로서 고흘이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서북방 요새인 신성과 백암성에서 돌궐의 침입을 물리치고 크게 위훈을 떨쳤다는 점을 제시했는데, 이는 향후 더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야 할 부분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고분과 유물-(동북아역사재단, 2009)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고구려의 고고문물』(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동명왕릉과 그 부근의 고구려 유적』(김일성종합대학,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6)
『朝鮮古文化綜鑑』(梅原末治·藤田亮策 編著, 養德社,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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