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경주 헌덕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41대 헌덕왕의 능이다. 헌덕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언승으로,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흙으로 덮은 원형봉토분이고, 매장주체부는 굴식돌방무덤이다. 판석을 병풍처럼 돌려 보호석을 설치하고 탱석을 끼워 판석을 고정시켰다. 탱석에 무덤을 수호하는 방위신으로 12지신상을 조각하였는데 돼지·쥐·소·호랑이·토끼상만 남아 있다. 12지신상을 부조한 신라왕릉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무덤 전면에 문인석과 무인석, 호인상(胡人像)과 같은 석물을 배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41대 헌덕왕의 능. 왕릉.
개설
내용
12지는 12지생초(十二支生肖)라고도 하는데 중국에서 방위와 시간개념으로 출발한 것으로 불교의 영향으로 12동물로 대응한 것은 후대의 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무덤에 있는 것은 방위신(方位神)으로 무덤을 수호한다는 의미에서 만들었다. 신라의 왕릉에는 경주 성덕왕릉 · 괘릉(掛陵: 경주 괘릉 석상 및 석주 일괄) 등 몇몇 예가 있다. 경주 김유신 묘에도 무덤 주위에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능에는 12지 중 돼지〔亥〕 · 쥐〔子〕 · 소〔丑〕 · 호랑이〔寅〕 · 토끼〔卯〕등 5개 상만 남아 있고 그밖에는 없어졌다. 나머지는 무덤 전방으로 흐르는 경주의 북천(北川)이 1742년(조선 영조 18) 8월 22일에 범람해서 무덤의 일부가 유실되었다. 당시 좌의정 송인명이 영조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으며 그로 인해 경상도관찰사가 수축하였다.
원래는 신라 제42대 경주 흥덕왕릉과 마찬가지로 무덤의 전면에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을 갖추고 무덤의 둘레를 따라 돌난간을 마련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현재 경주고등학교 정원에 놓여 있는 호인상(胡人像) 1구의 머리 부분이 원래 경주 원성왕릉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헌덕왕릉에는 원성왕릉과 마찬가지로 무덤 전면에 호인상과 같은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왕릉의 피장자에 대해서는 헌덕왕 외에도 조선시대에는 김유신으로 잘못 기록한 문헌도 남아 있으며 최근에는 진평왕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어 향후 새로운 연구 대상이 될 전망이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한국고고학전문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4)
- 『신라 후기 고분문화 연구』(홍보식, 춘추각, 2003)
- 『신라고분연구』(최병현, 일지사, 1992)
- 『고도경주』(경주시, 1982)
- 『문화재대관-사적편-』(문화재관리국, 1975)
- 「통일신라시대 왕릉 앞 석인 연구」(이재중,『석오윤용진교수 정년퇴임기념논총』, 논총간행위원회, 1996)
- 「신라왕릉의 재검토」(강인구,『삼국유사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 「경주지역문화유적보존개발계획」(경상북도·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1986)
- 「신라 십이지신상의 분석과 해석」(강우방,『불교미술』1,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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