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성빈(聖賓), 호는 장밀헌(藏密軒). 참의 송시철(宋時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참판 송광연(宋光淵)이고, 아버지는 송징오(宋徵五)이며, 어머니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이단상(李端相)의 딸이다.
1719년(숙종 45)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로 있을 때 당시 세제로 있던 영조의 총애를 받아,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기용되었다가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어 붕당의 금지를 건의하여 영조의 탕평책에 적극 협조하였다.
1727년(영조 3)에 죄인의 관작을 삭탈할 때 그들의 과거 합격도 취소하자는 경연관(經筵官)들의 건의를 저지시켰다. 1731년 이조판서가 되어 노론·소론을 막론하고 온건한 인물들을 두루 등용하여 당론을 조정, 완화함으로써 영조의 신임을 두터이 받았다.
우참찬·호조판서 등을 거쳐 1736년에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도성의 권세 있는 집에서 공물을 사들이는 것을 금지시킬 것을 건의하여 영조의 재가를 얻었다. 1740년에 좌의정이 되어 당쟁을 억누르고, 탕평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기 위하여 영조의 명으로 박사수(朴師洙)와 함께 신임사화의 전말을 기록한 『감란록(勘亂錄)』 6권 4책을 편찬하였다. 사람됨이 기지와 정략이 풍부하였다고 한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