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만 1,174㎡. 왕릉의 규격은 밑둘레 46m, 높이 5m이다. 그 북서쪽에는 성덕왕의 형인 효소왕의 능으로 전하는 원분이 있다. 분구(墳丘)의 언저리에 높이 90㎝ 정도의 판석을 두르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甲石)을 올렸다.
판석들 사이에는 탱주(橕柱)를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석재를 세워 보강하였다. 이 삼각형 석재들 사이에 환조(丸彫)의 십이지신상이 배치되어 있었다. 십이지신상들은 모두 방형기단(方形基壇) 위에 올려져 있었으며 심하게 파손되었다.
가장 바깥쪽에는 석주를 둘렀는데 석주의 상하 2개소에는 난간의 돌살대 혹은 난간살대 등을 끼우기 위한 홈이 패어 있다. 관석들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분구 언저리에 둘러진 판석과 석주 사이의 공간에는 깐돌[敷石]이 있다.
능의 앞쪽에는 안상을 새긴 석상(石床)이 놓여 있는데 상면(床面)은 2매의 판석으로 조립하였다. 능의 네 모퉁이에는 돌사자를 배치하였고, 석상의 앞쪽에는 문인석 2구와 무인석 2구를 세웠던 것 같으나, 현재는 무인석 1구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石人) 1구밖에 남아 있지 않다. 무인석은 방형 기단 위에 올려져 있으며, 의장용 갑옷인 양당개(裲襠鎧)를 착용하고 양손으로 칼을 짚고 있는 모습이다.
능의 앞쪽 좌측에는 능비가 있는데, 비신(碑身)과 이수(螭首)는 없어졌으며 목이 부러진 귀부(龜趺)만이 남아 있다. 귀부는 웅대한 편이나 몸체가 비교적 납작하다. 능비 주위의 조사에서 약간의 비석조각이 검출되었으나 대부분 무늬가 없으며 판독된 명문은 ‘武(무)’와 ‘跡(적)’ 2자뿐이다.
현재 이 능에 묻힌 사람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 이 곳 석조물의 조각기법은 통일신라 초기양식에 속하며, 십이지를 비롯하여 석인·석수·능비를 갖춘 신라 최초의 완비된 형식으로 주목되는 능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