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만 4,169㎡. 미발굴분이며 구조는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로 추정된다.
서악동 구릉의 동사면에 종렬한 5기의 대형 원분(圓墳)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다. 높이 약 13m, 주위 둘레 112m이다. 분구의 언저리에는 자연석으로 된 호석(護石)을 돌렸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시대 능묘의 분구 언저리에는 잘 다듬은 돌로 호석을 돌리고 여기에 동물머리에 사람몸을 한[獸首人身] 십이지(十二支)를 배치하거나 다시 석책(石柵)을 돌리고 있다. 이에 비하면 무열왕릉의 봉분장식은 소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능의 전방 동북쪽에 능비(陵碑)가 있으나 현재는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碑首)밖에 남아 있지 않다.『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비신은 조선시대까지는 잔존했던 것 같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속(續)에는 비문의 글이 당대의 명필이며 무열왕의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의 것이라고 되어 있다.
비신의 귀부는 장방형의 대석 위에 올려진 것으로, 네 발과 머리의 표현은 생동감이 넘쳐 있어 신라 조각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등의 전면에 거북등무늬[龜甲文]를 새기고 그 주위에는 비운문(飛雲文)을 돌렸다.
비신의 갓머리장식인 이수의 전면에는 6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모양이 새겨져 있고, 그 중앙에는 전체(篆體)로 “태종무열왕지비(太宗武烈王之碑)”라는 2행 8자가 양각되어 있다.
이 명문에 의해 무열왕릉이 신라의 역대 능묘 중 피장자(被葬者)가 명확한 유일한 능묘가 되었다. 귀부의 네 모퉁이에는 초석이 남아 있어 당초에는 비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열왕릉의 귀부와 이수는 비록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신라에 발현된 것이나, 조각의 정교함과 화려함에 있어서는 도리어 당대의 조각품을 능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