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석(列石)이라고도 한다. 호석의 발생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베리아의 쿠르간묘의 석축(石築)에 기원을 두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고 있으며, 고구려의 경우 광개토왕릉에 보이고 있다.
즉, 방단(方壇)으로 쌓아올려 만든 무덤 각 변의 밑 부분에 거대한 돌을 세 개씩 기대어 세웠다. 이와 같이 고구려에서는 5세기 초기에 능을 만들 때 둘레돌을 써서 무덤의 석재(石材)가 빠져나가지 않게 하였다.
백제에서는 부여 능산리(陵山里) 1호분과 4호분의 전변에 석축을 한 것이 보이고 있고, 신라의 경우 가장 간단한 형태로 봉토분(封土墳)의 저변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돌아가면서 비교적 큰 돌을 배열한 둘레돌의 열(列)이 태종무열왕릉에 마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에서는 둘레돌의 기능이 단순히 무덤의 외부를 보호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기능면과 아울러 장식적인 측면이 포함되어 발전하고 있다.
즉, 왕이나 지배층의 무덤에 봉토분의 밑 부분을 돌로 쌓아올려 무덤 보호의 기능을 강화하고 있으며, 더욱이 돌로 쌓아 만드는 대신 다듬은 큰 판석(板石)을 짝 맞추어 무덤 주위로 둘러서 둘레돌로 하고 있어 보다 발전된 형태임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판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마련한 무덤 가운데 둘레돌 사이에 거의 같은 간격으로 십이지상(十二支像)을 조각한 돌을 세움으로써, 무덤의 외형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십이지신상은 원래 지구가 태양을 도는 길인 황도(黃道)의 원(圓) 위의 별들을 짐승모양으로 나타낸 것이며, 근동지방에서 일어나 중국을 거쳐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이다. 이것을 무덤에 배치한 것은 무덤 안을 하나의 우주로 만듦과 아울러 십이지로 하여금 무덤의 수호신(守護神) 구실을 하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은 풍습은 중국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나 이를 돌에 새겨 무덤의 호석으로 발전시킨 것은 통일신라인들의 창안이다.
통일신라의 왕릉에서 십이지상을 갖춘 경우를 보면, 성덕왕릉·경덕왕릉·헌덕왕릉·흥덕왕릉 등이 있으며, 그 밖에 김유신묘·괘릉(掛陵) 및 경주 구정동 방형분(方形墳)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통일신라 호석의 십이지신상 조각은 김유신묘를 정점으로 하여 점차 그 조형감각이 퇴락해가고 있다. 따라서 9세기에 축조된 헌덕왕릉의 십이지들은 조형감각을 상실하고 단순히 줄을 새겨놓은 형태에 머무르고 있다.
이것은 당시 불교조각의 전반적 퇴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통일신라에 와서 왕자의 무덤을 갖추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잡은 십이지신상을 갖춘 호석은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었다. 개성 부근의 왕묘들에 그 모습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조각솜씨는 예술가의 솜씨라기보다는 단순한 석공의 그것이라고 할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특히, 고려 중기부터는 십이지신상의 모습이 신라의 신장풍(神將風)에서 문관복(文官服)을 입은 관인풍(官人風)으로 바뀌었으며 그 솜씨도 유치한 선각(線刻)의 수준으로 퇴락하였다.
그런데 고려 말 공민왕 및 왕비의 무덤인 현릉(玄陵)·정릉(正陵)에는 전대의 것에 비하여 다소 예술성이 높은 조각솜씨를 남기고 있어 주목된다. 이 공민왕릉은 이후 조선시대 왕릉의 모범이 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대체로 고려시대의 것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호석의 십이지신상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십이지신상 조각이 없는 세조의 광릉(光陵)과 순조의 인릉(仁陵)이 있는가 하면, 십이지신상 대신 모란무늬가 양각되기도 하였는데 인조의 장릉(長陵)이 효시이다. 조선시대 호석에 나타난 조각의 솜씨는 고려시대를 이어 특별히 새로운 외부로부터의 기술도입이 없었던 관계로 수준은 낮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