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깊이 0.61m, 길이 2.73m, 너비 2.14m. 화강암을 재료로 하여 만든 이 석조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안팎으로는 아무런 장식문양이 없어 단순하고 소박할 뿐, 특이한 구조는 없다.
이러한 석조는 지금도 여러 사찰에서 급수용기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때, 그 당시에도 급수용기로 사용되었으리라 믿어진다. 이 석조는 비교적 크고 조각수법은 단순하나, 장중한 작풍이 당대의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석조가 있는 일대에는 경주 동쪽의 관문에 해당되는 명활산(明活山)과 경주분지의 중심에 있는 경주 낭산 일원(사적, 1968년 지정) 사이에 보문평야가 있으며, 이 보문평야 동편으로 통일신라시대 보문사 터가 전해오고 있다.
이 절터에는 부처님을 모셨던 금당터[金堂址], 동서 탑지(塔址)와 석등 받침돌[石燈臺石]·건물기둥 받침돌[柱礎石]·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 등의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普門(보문)’이라 새겨진 기와편이 수습되어 보문사가 있었던 위치로 보고 있다.
보문사 터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물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인 것으로 보아, 이 석조도 그 규모와 돌을 다듬은 솜씨가 같은 시기에 함께 만들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