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86년 6∼8월에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무덤의 성격이 밝혀졌다. 발굴조사는 향토사학자들의 모임인 신라문화동인회의 사전조사로 신라 왕릉급의 무덤이 틀림없다는 판단 아래 학술발굴조사와 정비보존을 건의한 결과 이루어졌다.
무덤은 원래 마른 냇바닥을 이용해 땅을 고르고 일정한 범위를 잡아 널길[羨道]을 갖춘 돌방[石室]을 만들었으며, 안팎의 이중으로 된 둘레돌[護石]을 마련한 뒤 흙을 덮어 완성하고 있다. 돌방의 크기는 한 변의 길이 2.6m, 높이 2.8m이고, 널길은 길이 1.5m, 너비 1m, 높이 1.2m이며, 돌방 내부에는 길이 2.1m, 너비 1.7m, 높이 0.5m로 된 주검받침[屍床]이 있다.
주검받침은 할석을 이용하여 잘 쌓아올리고 윗면과 벽면을 진흙으로 고르게 바른 후 다시 회를 입혔고, 그 위에 동쪽으로 돌로 만든 베개[石枕], 어깨받침 및 다리받침을 놓고 있다. 벽면의 틈에는 회를 발라 보완했고 주검받침 측벽에도 회를 고르게 발랐다. 회칠한 벽에는 그림은 없었다. 주검받침 위에는 시체와 함께 부장품을, 바닥에는 토기·토용(土俑) 등의 부장품을 넣었다.
돌방 밖으로는 할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돌리고, 다시 그 밖으로 잘 다듬은 돌을 사용하여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병풍처럼 둘레돌을 만든 다음, 봉토흙을 쌓아올림으로써 무덤이 완성되었다.
주검받침 위의 모든 유물은 도굴로 인해 없어졌고 돌베개·어깨받침·다리받침은 모두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토기를 비롯한 토용과 청동제 십이지상이 방위에 따라 배치되어 있었다. 돌방 내에서 수습된 유물은 토용 28점, 청동제 십이지상 7점, 소형유리곱은옥 4점, 소형유리구슬 3점, 굽달린 접시 등 모두 64점이다. 그 중 인물토용과 청동제 십이지상의 출토는 지금까지 그 예가 없는 처음 발견된 일로 기록되었으며, 신라의 무덤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고분의 역사상의 위치와 이들 출토유물들이 가지는 의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인물토용의 경우 전체 28점 가운데 남자상 15점, 여자상 13점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토용은 모두 머리에 복두를 쓰고 있고, 홀(笏)을 잡은 문인상, 홀을 잡고 턱수염이 마치 서역인(西域人)처럼 텁수룩하게 표현된 문인상, 두 사람이 마주보고 대련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무인의 태껸상 등 여러 가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채색이 되어 있어 입체감을 더해주고 있다. 여인상은 모두 두 손을 모아 상대방을 공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얼굴모습은 모두 다르게 표현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28점의 인물토용은 각기 얼굴모습과 자세가 다르게 표현되어 있고, 길이 12∼21㎝ 크기로 매우 사실적인 수법을 보이고 있는데, 특히 채색토용은 인물의 전신상을 흙으로 빚은 뒤 백토(白土)로 칠하고 그 위에 붉은색의 물감으로 채색을 하였다.
이들 신라토용은 이제까지 부여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도용(陶俑), 또는 신라영역에서 출토된 토우(土偶)들과 비교하면 인물묘사에 있어서 엄격한 사실의 재현에 중점을 두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토용은 무덤 속에 시신과 함께 묻은 부장품으로 죽은 뒤에도 무덤의 주인공을 돌볼 사람을 인물상으로 만든 것으로 무덤의 주인공과 함께 노비 등 산사람을 묻는 순장제도(殉葬制度)가 금지된 후에 이루어졌다. 『삼국사기』 지증왕 3년조에 왕이 순장을 하지 못하도록 한 내용으로 미뤄볼 때 이 시기 이후부터 순장이 없어지고, 인물토용을 부장품으로 묻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인물토용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입증해줄 뿐만 아니라, 그 모습에서 지금까지 확실하지 않던 당시인의 얼굴모습을 볼 수 있으며, 입고 있던 의복을 통해 당시의 복식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학술적 의미는 지대하다.
다음으로 청동제 십이지상도 지금까지 무덤 내부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다.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는 동물모양이나 몸은 사람모양으로 상반신은 벗은 채로 두 팔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형태이며, 허리에는 허리띠와 요갑(腰甲)을 두르고 있고, 겹쳐 내린 옷의 표현이 생생하다. 제작수법이 세밀하고 정교하여 통일신라시대의 금속공예 기술의 뛰어난 일면을 살필 수 있다.
십이지신상은 중국에서는 십이지생초(十二支生肖)라고 한다. 이것은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하여 방위·시각 등에 응용된 것으로, 은나라 때부터 썼으며 무덤 안을 작은 우주로 만들고 십이지로 하여금 무덤의 수호신 구실을 하도록 한 것이었다. 실제로 중국 창사(長沙) 남문 밖 황토령에서 1956년 발굴조사된 당나라의 벽돌무덤[塼築墳]에서 길이 20∼22㎝ 되는 십이지토용이 발견된 바 있고, 함께 나온 유물 중 개원통보(開元通寶)가 있어 8세기 전기에 해당되는 무덤임이 밝혀졌다.
십이지를 돌에 새겨 무덤의 봉토 주위의 둘레돌로 발전시킨 것은 신라인의 창안으로, 경주에는 성덕왕릉·경덕왕릉·원성왕릉·진덕왕릉·흥덕왕릉·김유신묘 등에 잘 남아 있고, 또 전 민애왕릉과 김유신묘의 보호석렬 외부에서 납석제의 십이지가 일부 출토되었다. 그러나 용강동에서 출토된 청동제십이지상과는 모습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번 출토된 청동제십이지상의 섬세한 주조기술은 예술품으로서도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이상과 같이 용강동무덤에서 출토된 인물토용과 청동제십이지상은 통일신라 당시 신라와 당나라의 문물교류관계를 밝힐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에 있어서 6세기 초기에 순장이 금지된 사실을 입증하고, 통일신라시대의 복식연구에 있어서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묘지석(墓誌石)이나 다른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인물토용에 나타난 복식의 색깔이 보라색이 아닌 붉은색인 점과 문인이 잡고 있는 홀이 상아홀로 여겨져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이는 6두품에 해당되므로 주인공은 그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진골 이상임은 분명하다.
무덤의 축조연대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에서 십이지의 발생, 인물토용에 나타나는 복식의 형태 등으로 미루어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걸치는 통일신라시기의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