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원성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에 있는 통일신라의 제38대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능이다. 물 위에 왕의 시신을 걸어 안장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걸 괘(掛)자를 붙여 괘릉이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통일신라 왕릉으로 봉분과 돌사자·문인석·무인석·화표석 등 석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 무인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능묘 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으나 십이지신상을 호석에 배치한 것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이다. 또한 각종 석조물에서 보여주는 뛰어난 조각 수법 등은 고도로 발달한 신라의 예술적 경지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낮은 구릉에 남면해 있다. 이 능은 초기에 괘릉이라 불렀다. 괘릉이라는 이름은 왕릉이 조성되기 이전에 원래 작은 연못이 있어 연못의 원형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유해를 수면 상에 걸어 안장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완비된 능묘제도를 보여주고 있는 이 괘릉은 봉분과 그 전방의 석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능은 외형상 원형토분(圓形土墳)으로 규모는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봉분 아래에는 봉토(封土)를 보호하기 위한 호석(護石)이 설치되어 있다. 호석은 목조건축의 석조기단(石造基壇)과 같이 지대석(地臺石) 위에 높이 95㎝, 길이 120㎝ 크기의 판석(板石)으로 된 면석(面石)을 놓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올렸다. 각 면석의 사이에는 봉분 내부로 뿌리가 길게 뻗어 면석과 봉토가 붕괴되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탱석(撑石)을 배치했는데, 탱석의 전면은 면석보다 약간 앞으로 내밀어져 있다. 탱석에는 두 칸 건너서 하나씩 무복(武服)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십이지신의 형상을 조각했으며, 그 조각수법은 신라 십이지신상의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호석의 밖으로는 길이 110㎝, 너비 40㎝의 부채꼴 판석을 정연하게 깔아 회랑으로 조성하였다. 회랑 둘레에는 높이 1.7m의 네모진 돌기둥을 세워 돌난간을 설치했는데, 현재 돌기둥은 25개가 모두 남아 있으나, 돌기둥 사이사이에 2단으로 끼웠던 난간살대는 거의 유실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봉분의 바로 앞에는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사각형 석상(石床)이 놓여 있다. 봉분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위치로부터 시작하여 동서로 약 25m 사이를 두고 북쪽으로부터 2005년 보물로 일괄 지정된 돌사자 두 쌍, 문인석(文人石) 한 쌍, 무인석(武人石) 한 쌍과 무덤임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한 쌍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 차례로 늘어서 있다.
이 괘릉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원성왕이 재위 14년에 죽으니 유해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라 하고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고 하였다. 지금 괘릉에 비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인근에 숭복사 터가 있어 괘릉이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이와 같은 유형의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주목되는데 페르시아 무인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통일신라 왕릉의 대표격인 이 괘릉의 능묘제도는 당나라와의 문물교류를 통하여 그 능묘제도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십이지신상을 호석에 배치하는 것은 신라인의 창안이며, 각종 석조물에서 보여주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당시 신라인의 고도로 발달한 예술적 경지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능묘에 배치된 십이지신상은 따로 조각해 호석 앞에 별도로 세웠던 성덕왕릉의 형식에서 탱석에 직접 조각하는 형식으로 발전된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