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마을 주민들이 토석(土石)을 채취하던 중 발견하였다. 1989∼1991년도에 한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신라시대 고분 28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유적은 금산군 추부면 소재 표고 392m의 철마산(鐵馬山)에서 뻗어 내린 지맥의 말단부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다. 원래 이 곳에는 청동기시대 움집터들이 있었으나 이들을 파괴하고 신라시대 고분군이 설치되었다.
고분들은 오랜 동안의 경작으로 모두 파괴되어 지상엔 흔적이 없었으며 지하에서 매장주체부의 하부구조만 발굴되었다. 고분들은 모두 옆트기식 돌방무덤으로 구릉 경사면을 약간 파서 바닥을 고른 다음 평면 직사각형으로 4벽을 깬돌로 쌓아 올렸으며, 남쪽 벽은 매장 후에 막은 출입부였다.
천정은 넓은 판석으로 덮은 것이었으나 천정석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았다. 바닥에는 시상(屍床)이 설치되었다. 1인용만 설치된 것도 있었으나 처음 설치된 시상에 추가로 잇대어 설치한 2인용 시상도 많았다.
출토유물은 토기들이 많았다. 짧은 다리가 붙은 단각고배(短脚高杯), 아가리가 쟁반같이 튀어나온 부가구연장경호(附加口緣長頸壺) 등 6세기 후반기의 특징적인 신라토기들이었다. 이 외에 컵형토기, 짧은 다리가 붙은 곧은입항아리, 가락바퀴가 출토되었다. 철기로는 작은 손칼과 낫이 몇 점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진흥왕(眞興王)대에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한반도 중부지방과 동해안의 원산만 일대로 진출했던 지역에 널리 분포한다. 이 고분군도 그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설치된 6세기 후반기의 신라 고분군임이 분명하다. 또한 이 고분군은 6세기 후반기에 신라가 백제의 수도 부여에서 지근 거리인 이 곳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준다. 554년 백제의 성왕이 신라군에 의해 전사한 관산성(管山城)이 이 고분군 동쪽 10여 ㎞ 지점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