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11월 9일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장상동에서 아버지 상동(相東)과 어머니 심분년(沈粉年)의 2남으로 태어났다.
1956년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마치고, 1962년 숭실대학 사학과, 1964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숭실대학 박물관 연구원을 거쳐 1968년부터 숭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숭실대학교 박물관장, 학생처장, 교무처장, 총무처장, 인문대학장을 역임하였다. 1974년과 1982년의 두 차례에 걸쳐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서 수학하였다.
주요 연구분야는 한국 청동기시대 문화로 고인돌과 무문토기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그의 논문은 유적 · 유물에 대한 치밀한 관찰을 토대로 신중한 학풍을 견지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1964년의 「한국 지석묘(支石墓)의 형식과 연대문제」에서 제시된 한반도 고인돌의 형식분류는 이후 한반도 고인돌 연구의 지침이 되었다. 1995년의 「후기 지석묘사회의 성격」에서는 고인돌의 주인공이 부족장이나 그 가족이라는 종래 학계의 견해에 대해, 전남지방의 고인돌들을 예로 들어 전투에서 전사한 부족원들의 기념비적 무덤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였다.
1969년의 「한강유역 무문토기의 연대」, 1986년의 「한국 무문토기의 연구」에서는 한반도 청동기시대 무문토기 편년의 골격을 세우고 무문토기의 성립과정을 밝혔다.
그의 연구는 한국고대사에도 미쳤다. 1967년의 「신라소경고(新羅小京考)」에서는 신라의 소경이 신라가 무력으로 점령한 지역의 지배층을 회유 감독하기 위해 다른 지방으로 천사(遷徙)시켜 설치한 것임을 밝혀냈다.
1991년의 「고고학상으로 본 예맥(濊貊)」은 청동기시대에 대한 그의 고고학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한국 상고사부분을 탐구한 것이다. 여기서는 요서(遼西)지방 비파형(琵琶形) 청동단검(靑銅短劍)문화의 주인공을 동호족(東胡族)으로 판단하는 견해를 비판하고 예맥으로 보면서, 고조선의 성립지역을 요서 조양(朝陽)지역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1966년 서울 역삼동의 청동기시대 집자리 발굴을 시작으로 유적 발굴조사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1979∼1983년의 수원 서둔동 유적 발굴에서 한강 이남지방 최초로 외줄 구들이 설치된 원삼국시대 취락 유적을 찾아냈다. 1987∼1993년에는 경기도 하남시 미사동의 선사시대 취락지 연합발굴을 지휘하여 신석기시대로부터 백제시대에 걸치는 취락 유적과 고대의 경작지로서는 처음으로 백제시대의 밭을 발굴해내는 성과를 거뒀다.
그는 1990∼1991년 한국고고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94년부터는 한반도 남해 고대문화교류 중(中) · 일(日) · 한(韓) 공동연구위원회 한국대표로 활동하였다. 1995년 12월 사망하였다.
1996년 유저(遺著) 『한국 청동기문화의 연구』가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