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은 유적이나 유물과 같은 잔존 물질 자료를 통해 인류의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수백만 년 전 초기 인류의 화석이나 석기로부터, 고대의 기념물이나 도시 유적은 물론 최근에 버려진 건물이나 폐기물 더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질 자료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인류의 문화를 폭넓게 이해하는 것이 고고학의 연구 목표이다.
고고학의 연구에는 다양한 분야가 있다. 고고학자가 전문적으로 다루는 지역이나 시대, 그리고 자료에 따라 각자의 전공 분야가 나뉘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사 · 연구의 이론이나 방법, 혹은 고고학자의 실천과 활동의 방향과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고고학의 분야는 다양하게 나뉠 수 있다.
거의 대다수 고고학자는 한국, 아시아, 유럽, 혹은 아프리카 등의 지역 전문가로서 연구 기반을 가지고 학계에서 활동한다.
고고학은 시대에 따라 문자의 기록이 없었던 선사 고고학, 그리고 역사 기록이나 민족지가 전해져 그것을 물질 자료의 해석과 대조해 볼 수 있는 역사 고고학으로 크게 구분한다. 보통 고고학자는 선사 고고학 안에서도 전시대를 다룰 수 없으므로 구석기나 신석기 시대 혹은 청동기나 철기 시대 가운데 어느 한 시대를 선택하기 마련이며, 역사 고고학도 고대나 중세 혹은 근세로 나누어 그중 어느 한 시대를 전문적으로 연구한다.
고고학자는 또한 그가 전문적으로 다루는 물질 자료에 따라 연구 분야가 뚜렷이 구분된다. 이를테면 토기 고고학, 고고 금속학, 취락 고고학, 동물 고고학, 식물 고고학, 환경 고고학, 그리고 유물의 화학적 분석을 담당하는 고고 화학 등은 고고학의 대표적인 전문 연구 분야이다.
그 밖에도 고고학의 독특한 전문 분야 가운데는 수중 고고학이나 디지털 고고학도 있다. 수중 고고학이 해저에 묻힌 침몰선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분야와 같은 것이라면, 디지털 고고학은 정보기술이나 디지털 미디어를 고고학의 자료 조사와 분석, 그리고 해석에 응용하는 분야이다.
고고학의 사회적 공헌에 초점을 맞춘 연구와 활동의 분야인 대중 고고학, 혹은 공동체 고고학은 최근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정확한 국제적 명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국가유산의 보존 및 활용과 관련된 문화유산 보존 과학이나 국가유산 관리도 고고학의 아주 중요한 연구와 실천의 분야이다.
고고학은 인류사회와 문화를 연구하는 인문 · 사회학의 한 분과이지만 유사한 성격의 역사학이나 인류학과는 달리 물질 자료를 관찰과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처럼 일차적 대상이 유물 및 유적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고고학은 그러한 물질 자료에 나타나는 어떤 양상이 인간의 사회 · 문화적 활동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깊이 있게 사색해 왔으며, 타당한 해석을 도출하기 위해 그만의 독특한 방법론을 발전시켜 왔다.
고고학이 다루는 자료를 간단히 범주화하기는 어렵지만, 하나의 석기나 질그릇과 같이 과거 인간에 의해 제작되거나 변경된 소품을 유물이라고 한다면, 주거지나 무덤처럼 구조물로 남겨진 유구, 그리고 인간에 의해 점유되었던 장소라는 의미의 유적 등으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고학 자료는 과거 인간에 의해 남겨진 것에 국한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의미 있는 사회문화 해석을 위해서는 과거의 기후, 지질, 혹은 식생 등의 정확한 복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토양, 동물과 식물의 유체와 같은 생태 · 환경 유물도 고고학의 필수적 연구 자료가 된다.
고고학자가 어떤 유물을 조사 · 연구할 때 각각의 유물이 지닌 특성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맥락(context)이 매우 중요하다고 받아들여진다. 가령 발굴 현장에서 토기 파편이나 동물뼈 등의 유물이 한 유적에서 발견되었을 때 고고학자는 그것이 놓인 층위, 분포 상태, 유물들 사이의 관계나 유구 안에 놓인 위치 등과 같은 일련의 맥락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기록한다.
고고학 유물을 둘러싼 전후의 맥락이 중요한 이유는 이를 통해서만 고고학자들이 해당 유물이 그러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 과거 사람들의 활동에 관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 대상이 유물 · 유적인 고고학은 탐사와 발굴이라는 자신의 독특한 자료 수집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 탐사가 유물 및 유적과 같은 대상물의 존재와 분포를 일차적으로 파악하는 절차라면 발굴은 일정 유적 안에서 유물과 유구를 노출하고 그 결과를 기록하면서 필요한 유물과 시료를 채집하는 고고학의 자료 획득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가장 간단한 탐사법은 고고학자가 이동하면서 지표면을 조사하는 작업이다. 이와 같은 지표 조사법은 고고학자가 현장의 정황을 일일이 들여다보면서 생생하게 기록하는 방법이긴 하지만 아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아야만 식별되는 대규모 인간 활동의 흔적이나 숲으로 덮여 전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기 어렵다.
그래서 매우 넓은 지역을 정밀하게 탐사하여 유적의 상태를 기록하기 위해 첨단기술이 동원되기도 한다. 드론이나 항공기, 위성을 이용하여 유적의 양상을 포착하는 항공사진법과 원격탐사법과 같은 방법이 그러한 것이다.
최근에 그 효율성이 널리 알려진 라이다(LiDAR)는 레이저 펄스의 반사 신호를 포착하고 걸러내어 숲으로 덮인 구조물과 같은 유구를 넓게 탐지해 내기도 한다. 한편, 땅속에 묻혀 있는 유물과 유구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그것을 탐지해 내는 기술이 개발되었는데 최근에는 지중 레이다, 혹은 자기장 탐사와 같은 지중 탐사 기법들이 활용되고 있다.
고고학은 자료가 물질인 까닭에 여타의 인문사회학과는 달리 여러 자연과학 분야의 참여나 그들과의 학제적 연구가 학문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해왔다. 물리화학 분야에서 개발한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이나 포타슘-아르곤연대측정법과 같은 절대연대 측정법이 없었다면 토기 제작과 농경의 시작, 혹은 거석 기념물의 축조 연대는 물론이고 인류의 출현에 관해서도 지금으로부터 과연 얼마나 오래된 일인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꽤 오래전부터 암석학, 금속학, 그리고 분석화학의 분야와 학제적 연구를 통해 석기나 토기, 혹은 청동기나 철기의 제작 기술을 복원하고 원산지를 추정해 왔다. 과거의 생업과 환경에 관한 연구 분야에서는 동물학, 식물학, 지질학, 그리고 고기후학 등의 공로가 컸다.
최근 첨단 분석 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사람과 동물의 뼈에서 고-DNA를 추출하거나 질소, 탄소, 황 동위원소를 분석하여 과거 사람들의 혈연관계나 식단을 파악하기도 하고 그릇이나 도구에 극소량이 남아 있는 유기질을 분석하여 생업이나 식량에 관한 정보를 얻기도 한다.
고고학은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학문의 한 분과로 성립하였다. 잘 만들어진 돌도끼와 같은 석기, 혹은 세련된 형태와 장식을 갖춘 청동 기물, 혹은 왕릉이나 고인돌과 같은 기념물 등은 누구나 호기심을 가질 만큼 인상적인 유물이나 유적이다. 이러한 유물에 사변적 해석을 덧붙였던 고고학적 관심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미 중국 송대(960~1279)에 상 · 주 시기의 청동기를 수집하고 명문을 연구했던 학자들이 나왔으며, 서구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에 인문학자와 예술가들이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물과 조각들을 광범하게 조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근대 고고학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고유물에 관심을 가지고 수집하거나 심지어는 유적의 발굴이 시도되었던 사례는 상당히 많았다. 이처럼 박물학자나 고유물 애호가, 혹은 미술사학자의 관심 속에 존재했지만 미분화된 상태로 존재했던 고고학적 관심과 활동이 19세기의 과학적 사고의 진전에 힘입어 학문적 기틀을 갖추게 된 것이다.
특히 당시 지질학과 생물학이 세상에 내놓은 지질학적 과정과 시간, 그리고 그 안에서 진행된 생물 진화의 개념은 고고학에 장구한 선사시대(先史時代)라는 개념을 제공해 주었고, 인류와 그 문화의 진화에 관해 탐구할 수 있는 사고의 틀을 마련해 주어 고고학의 학문적 자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고고학사를 통해 볼 때 삼시대 체계(Three Age System)의 고안은 근대 고고학의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중요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덴마크의 고고학자 톰젠(C. J. Thomsen; 1788~1865)이 1836년 발간한 책에서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로 구분했던 선사문화의 변화 체계는 빠르게 유럽의 여러 학자에게 받아들여졌고, 뒤이어 나온 다윈의 진화주의적 사고와 함께 인류사의 변화 도식에 적용되었다.
이어 각 시대 안에서의 변화를 어떻게 서술하는가 하는 문제를 고고학자들이 고심하게 되었는데, 19세기 후반 스웨덴의 몬텔리우스(Oscar Montelius: 1843~1921)가 유물의 형식 분류와 배열에 기초한 물질문화 편년법을 개발하면서 각 시대의 세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 시대에는 인류의 과거에 관해서만 시야가 확장된 것은 아니었다. 세계 각 지역에 분포하는 다양한 종족들의 문화가 민족지 조사를 통해 알려지면서 인류사회의 다양성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되었다. 특히 모건(L. H. Morgan: 1832~1917)이 저술한 『고대사회』는 인류학적 조사를 통해 알려진 종족의 문화와 역사 기록에 나오는 사회들을 인류문화의 발전이라는 진화주의적 관점에서 체계화한 명저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사관에 의한 인류사 도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은 인류문화에 관한 생각은 당대의 고고학적 사고에도 영향을 주어, 물질 자료, 그리고 인류학과 역사학 기록을 종합하여 인류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이 고고학 연구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19세기와 20세기 전반까지의 고고학 연구는 한편으로 물질문화의 지역 구분과 편년에 초점이 맞추어진 문화사 고고학의 성격을 갖지만, 다른 한편으로 학문적 실천은 제국주의 혹은 민족주의라는 당대의 정치 · 사회적 이념의 강력한 영향 아래 수행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당시 전 세계의 고고학자들은 물질 자료의 층서적 선후와 지리적 분포를 관찰하고, 혹은 유물 형식의 분류와 배열을 통해 고고학적 문화들을 정의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와 같은 문화사 고고학의 연구에서는 어느 한 지역에 일정 시기에 걸쳐 존속했던 어떤 특징적인 고고학 문화를 과거의 종족 집단과 결부시키는 관점을 정당화해 왔으며, 이에 근거를 두고 과거 물질문화들 사이의 관계를 종족 집단의 이주나 문화의 전파로 설명하려 하였다.
문화사 고고학은 과거의 물질문화를 고대의 종족 집단으로 파악하려는 관점을 연장하여 지금의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와 연결하려고 했으며, 당연히 이러한 시도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는 서구의 열강들이 나머지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제국주의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문화와 종족을 동일시했던 고고학적 관점은 인종주의의 사고와 결합하여 문화와 민족의 우열에 관한 담론을 만들어내거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를 제공해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20세기 전반까지의 고고학적 사고와 활동에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이 전 세계에서 이룩한 문화사적 편년의 성과는 결코 평가절하될 수 없으며 현대 고고학의 논의도 그것을 토대로 가능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재구성된 세계 질서 안에서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고 그 영향으로 고고학의 연구와 활동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게 되었다. 고고학은 무엇보다 자연과학과 기술의 급진전이 가져온 변화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특히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이 개발되면서 전통적으로 고고학자들이 매달려 왔던 문화사 편년은 그 중요성이 크게 줄게 되고 기능주의나 생태학 이론이 고고학 해석에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진보적인 고고학자들은 유물의 형식이나 층서 관계를 세밀히 비교 서술하는 작업에서 벗어나 주변 환경의 장기적 변화에 과거의 사회집단이 어떻게 적응해왔는가를 설명하려 하였다. 그래서 생태 자료를 폭넓게 수집하고 유물의 기능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을 관찰하고 분석하였다. 이러한 이론과 방법론의 변화는 연구의 방식도 크게 변모시켜 특히 서구의 고고학자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고고학 프로젝트가 기획되고 세계 곳곳에서 연구가 수행되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조사 연구 프로젝트는 문제-지향적 성격을 지니는데, 가령 인류는 왜 그리고 어떻게 농경을 시작하게 되었는가와 같은 특정 고고학적 질문에 맞추어진 기획이었으며, 이러한 방식의 연구를 통해 고고학은 지금까지 알 수 없었던 인류사의 과정에 관해 새로운 설명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 초, 과정주의의 등장은 현대 고고학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과정주의로부터 비로소 고고학은 이론적 · 방법론적 모색을 시작하였고 철학적 수준의 논의도 시도하였다. 무엇보다 과정주의자들은 실증주의 과학철학의 입장에서 명시적 논증을 중요시했으며, 고고학이 문화의 변이를 단순히 서술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것을 설명하는 과학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문화를 경제, 기술, 생태, 이념과 같은 하위체계로 조직된 체계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고고학의 궁극적인 연구 목표인 문화 변동의 과정 설명에서 기능주의나 생태학적 이론과 같은 물질주의 이론을 선호하였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과정주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탈과정주의는 고고학의 인문학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당시에 유행했던 포스트 구조주의의 이론을 받아들인 탈과정주의자들은 문화를 체계가 아니라 텍스트로 보았고, 물질문화에 대해서는 과학적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탈과정주의자들은 연역적 검증절차를 강조했던 과정주의에 의해 고고학적 논의의 폭이 축소되어가는 것을 우려하면서 고고학적 해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해석학과 현상학 등의 관점을 폭넓게 끌어들였다.
21세기의 시작을 전후하여 인류는 환경오염과 지구온난화와 같은 전 세계적 재난에 직면한 가운데 빅데이터, 초연결망, 그리고 인공지능과 같은 디지털 기술로 구축한 환경에 살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직면한 21세기의 고고학자들은 인간이 능동적 주체로서 자연을 이용한다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포스트 휴머니즘을 수용하게 되고, 정신과 물질, 자연과 문화, 혹은 인간과 환경을 2분법으로 보기보다는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관계로 파악하는 해석을 시도하게 된다.
21세기에 들어 등장한 신유물론이나 대칭적 고고학은 그러한 시대적 사고의 변화가 반영된 이론적 경향이다. 오늘날의 고고학자들은 종족의 역사를 밝히거나 인류와 문화의 진화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 외에 사회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대중과 지역사회에 고고학이 과연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대중 고고학 혹은 공동체 고고학의 연구와 실천으로 나타나게 된다.
한국에서 근대 고고학은 일제강점기 일본 연구자의 조사와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한일합병 이전에 일본 관학자의 고고학적 조사가 있었지만 1916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산하 고적조사위원회가 조직되면서 한반도 일원의 고고학 유적들이 본격적으로 조사되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유적 조사는 낙랑과 삼국시대(三國時代) 대형 고분의 발굴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고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유적이 관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이처럼 역사 시대 고총 고분에 대한 조사가 집중된 것은 화려한 부장품이 다량으로 출토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고대 한일관계의 증거를 찾으려는 일본측의 기대감도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선사시대와 일반 취락 유적의 조사가 외면받은 것은 당시 고고학자들의 관심이 적었기도 하지만, 당시 고고학적 발굴이 초보적 수준에 머물렀던 탓도 크다. 고분의 발굴도 초기의 방법은 고고학적 조사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칠었지만, 한반도 안에서 조사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개선되는 경향을 보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고고학 조사를 통해 상당한 양의 보고서와 함께 연구 논저가 출간되었다. 당시의 고고학 연구는 간단한 유물의 분류와 그것을 토대로 한 지역과 시기 구분의 서술이 중심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연구자들이 고고학적 해석 가운데 가장 중요시했던 것은 선사 및 고대 문화의 기원과 계통에 관한 문제였다. 특히 중국과 유라시아 내륙으로부터 한반도를 경유하여 일본 열도로 이어지는 종족과 문화의 기원과 계통에 관한 담론은 그들이 최상위의 연구 목표로 삼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당시 고고학 조사와 연구 활동은 전적으로 일본 제국대학의 고고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한국인의 참여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식민지 한국에서의 고고학적 활동이 한국 사회의 문화적 실천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며 8 · 15광복 이후 한국 고고학의 성장에 커다란 지장을 초래하였다.
8 · 15광복 이후 분단 체제에서 남한과 북한은 고고학의 연구와 실천에서 상반된 흐름을 보여주었다.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북한 고고학계의 활동이 남한을 앞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북한의 고고학계는 선사시대 주거지를 처음으로 노출하고 탄화곡물을 채집하였으며, 최초로 구석기시대 문화층을 발굴하였다.
북한 고고학계는 구제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상세하고 체계적인 발굴 보고서를 간행하면서 한국고고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북한 학계의 활동은 서서히 둔화하고 남한의 고고학 활동과의 편차는 점점 커졌다. 8 · 15광복 직후부터 북한 고고학계가 내놓은 고고학적 해석에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뚜렷했지만, 1960년대 초까지는 왕성한 학문적 토론이 이루어지는 등 학자 개인의 주장이 존중되는 편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주체사상이 등장한 이후 당의 지침이 고고학적 해석을 좌우하게 되었고, 1993년 단군능을 발굴하였다고 공표한 이후부터는 평양을 중심으로 인류의 4대 문명과 비견되는 대동강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등의 극단적인 국수주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8 · 15광복 직후 남한에는 고고학적 조사 경험을 가진 연구자가 거의 없는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을 중심으로 고고학적 활동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 초 문화재보호법(현, 국가유산기본법)이 제정되고, 고고학 관련 학과가 대학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고고학회도 조직되었다.
경주 지역 관광개발과 같은 국가의 국가유산 활용 정책에 따른 대규모 발굴과 산업화 과정에서 개발에 앞선 구제 발굴이 실행에 옮겨지면서 고고학적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8 · 15광복 후 상당히 오랜 기간 일제강점기에 보고된 자료와 연구에 의존하였지만, 1970년대부터는 새로 수집된 자료가 늘어나고 연구의 주제도 다양화되었으며, 김원용이 집필한 『한국고고학개설』과 같은 입문서도 출판되었다.
1980년대의 고고학 논문 가운데에는 이론적 개념에 관한 논의도 보이고 고환경 자료의 연구나 토기와 금속기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같은 새로운 방법론의 모색도 이루어졌다. 이 시기부터 전국 주요 대학에 고고학 관련 학과가 설치되어 전문 연구자들이 늘어났다.
한국고고학의 조사 연구 활동에 커다란 전기가 된 것은 1994년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문화재(현, 국가유산) 발굴 조사 전문 법인의 출현이다. 이후 국토개발사업의 급증과 맞물려 고고학 유적의 구제 발굴이 늘어났고 발굴 조사 기관과 그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의 수도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연구자의 수가 늘어나면서 1980년 후반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지역 고고학회와 시대별 고고학회가 경쟁적으로 조직되고 연구 논문을 발표할 지면도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이후 2000년대는 한국고고학의 활동이 양적인 측면에서 크게 성장하였던 시대이다.
한국고고학의 연구 주제가 다변화되고 각 분야의 전문 연구자가 생겨난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식물 유체와 동물 유체, 그리고 인골의 관찰과 분석을 통한 생업과 식단의 연구, 유물의 화학적, 광물학적 분석을 통한 제작 기술과 원산지 연구, 미시적 혹은 거시적 환경 변화의 연구 등 고고과학의 제 분야에서 전문 연구자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구석기시대는 약 600만 년 이전 최초의 인류가 등장하여 빙하기와 간빙기가 극적으로 교대하는 환경의 변화 속에 진화해 간 시대이다. 이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는 끊임없이 서식 영역을 확장하여 지금과 같이 전 세계에 퍼져 살게 되었으며 오늘날 우리와 같은 현생 인류로 진화해 왔다. 이 시대는 고인류의 화석과 그들이 남긴 뗀석기가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되며 절대연대의 측정이나 환경의 복원, 그리고 고고학 증거물의 매장학적 접근이 매우 중요한 연구 분야이다.
한국에서는 1960년대 초 북한과 남한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처음 발굴되면서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구석기가 확인된 유적만 천여 개소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구석기시대는 고인류 화석의 발견이 적고 석기를 중심으로 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는 편이다. 석기 유물군의 변화로 전기, 중기, 후기로 시기를 구분하기도 하지만, 전기 구석기 문화를 인정하지 않거나 후기 이전의 문화를 시기에 따라 구분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한반도 내에 발견되는 구석기시대 유적의 대다수는 3만 년 전에 시작되는 후기에 속하며, 이 시기 동안 고운 재질의 돌날 석기가 널리 쓰였다.
동북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토기가 제작되기 시작한 지역이다. 구석기시대 후기의 문화층에서 토기가 발견된 유적이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중국 강서성 일대와 일본 열도 그리고 흑룡강 유역이 그러한 지역으로 러시아와 일본의 고고학계는 토기의 출현을 시대 전환의 주요 지표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한국고고학계도 제주도 고산리 유적과 같은 데서 토기가 등장하는,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을 신석기시대의 시작으로 간주한다.
신석기시대는 농경으로의 전환과 함께 시작된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의 신석기시대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농경의 증거들이 발견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시대에는 움집이 모여 형성된 취락과 패총, 무덤 등이 고고학 조사를 통해 확인되는데, 대다수 유적은 해안가나 큰 하천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연구는 문화의 기원이나 계통, 유물과 유적의 편년에서 출발했지만, 도구나 동식물 유체의 관찰을 통한 생업과 식단, 취락의 분석을 통한 사회조직, 그리고 환경의 장기적 변동에 따른 적응의 문제로 논의의 주제가 옮겨가고 있다.
서기전 1,500년 무렵부터 농경에 집중했던 집단이 하안 대지를 점유해 나가면서 한반도의 청동기시대가 시작된다. 최초로 사용된 청동기는 집자리에서 발견되는 장식 소품들이었는데 비파형동검이 등장하면서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쓰이고 드물게 의례 장소에서 발견되는 사례도 있다. 이 시대를 거치면서 농경 취락이 수적으로도 증가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인구가 집중된 대규모 취락도 형성된다.
지석묘와 석관묘를 비롯한 다양한 형식의 무덤이 등장한다. 특히 남부지방에서 주로 발견되는 지석묘 가운데는 거대한 묘역을 가진 것도 있고 다수의 무덤과 함께 복합 분묘군을 형성하기도 한다.
탄화 작물이나 경작지의 분석을 토대로 한 농경, 석기와 청동기, 혹은 옥기(玉器) 등의 생산과 교환, 주거와 취락, 그리고 분묘와 부장품, 그 공간적 분포를 통한 사회조직과 정치 권력 및 경관 등에 관한 접근은 이 시대 연구의 중요한 주제이다. 특히 농경 도구와 청동기, 그리고 분묘의 형식 등은 중국 동북지방의 그것과 유사한 점이 많아서 일찍부터 광범한 지역 간 관계와 상호작용에 대해 많은 연구자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점토대토기 취락과 청동기 부장묘의 등장을 기준으로 초기 철기시대를 정의한다. 방사성탄소 연대로 파악되는 점토대토기군의 출현은 대략 BC 400년 전후에 해당하지만, 풍부한 세형동검 유물군이 나오는 개인묘는 그보다 늦은 시기에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초의 철기는 철곽(鐵钁)과 쇠끌 등 농공구의 형태이나 엘리트의 분묘에서 세형동검 유물군과 함께 부장품의 하나로 발견된다. 한반도 안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중국 동북지방에서 위세품으로 반입된 것인데, 한반도 남부의 분묘에 부장된 시기는 서기전 2세기 무렵이다.
고인돌과 같은 기념물적 분묘의 축조가 중단되고 청동기시대 후기의 대형 취락도 해체된다. 이전 시기의 사회적 관계망이 해체되고 인구의 재배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대 말기에 일부 지역에서는 새로운 사회정치적 중심지가 형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초기 철기시대는 중원의 고대 국가와 접촉이 시작되면서 단편적이지만 역사 전승이 시작되는 시대이며, 이어지는 원삼국시대는 좀 더 풍부해진 기록과 대조해 볼 수 있다.
한국 고고학계는 서기전 1세기에 시작되는 원삼국시대(B.C. 100~A.D. 300)부터를 역사고고학으로 포괄하는데, 이후 역사학의 시대 구분에 따라 삼국시대를 고대 고고학,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를 중세 고고학으로 연구 영역을 구분한다.
원삼국시대에는 중원의 고대 제국이 한반도 서북지역에 군현을 설치하는 등 주변 사회에 개입하면서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시작된다. 주민의 유입이나 접촉을 통해 새로운 토기와 철기 생산 기술이 수용되고 수공업의 기술혁신이 이루어지며, 만주와 한반도 일부 지역에서는 사회정치적 통합이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지리적 권역에 따라 가옥의 구조나 분묘의 형태와 같은 물질문화의 지역 차가 뚜렷해지고, 일부 지역에서는 방어 취락과 엘리트의 분묘군으로 표시되는 정치체의 거점이 형성된다. 이러한 물질문화의 양상은 3세기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 전하는 만주와 한반도 일원의 고대 종족과 정치체의 분포와 대조해 볼 수 있다. 집단의 정체성, 정치체의 형성, 광역의 지역 간 관계망, 교역과 이주 및 접촉, 수공업의 기술혁신 등에 관한 논의가 이 시대 고고학의 핵심 주제이다.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가 고대 국가로 성장했던 삼국시대에는 각 나라의 도성이 구축되어 도시화가 진행되고 중앙과 지방에 지배집단의 고총 고분군이 조성된다. 철기와 토기 대량 생산을 위한 공방이 곳곳에 배치되고,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방어 전문 시설인 산성도 교통의 요충지에 건설된다.
한국의 고대 고고학은 다른 시대에 비해 연구자의 수가 많은 편인데 고분과 부장품을 연구자료로 많이 활용하고 있다. 이 시대의 고고학은 국가 형성 과정이나 정치 권력의 성격과 변화, 고대 삼국과 중원 왕조, 그리고 왜 사이의 대외교류에 관심이 높고 한국 고대사의 문제와 연결된 연구 주제를 많이 다루고 있다.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적과 유물에 관해서는 고고학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구제 발굴(救濟發掘)이 제도화되고 철저히 시행되면서 1990년대 이후 이 시대의 조사 성과가 급증하였다. 이 중세의 유적과 유물은 역사학, 미술사, 혹은 민속학에서 더 많이 다루어 왔으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자료가 급증하면서 이 시대의 고고학자가 늘어나고 중세 고고학회도 창립되었다.
사찰, 분묘군, 관청과 민가, 산성, 생산시설 등과 그로부터 출토되는 도자기와 와전, 생활용 도구와 생산 도구, 종교 유물, 의복 등에 관한 고고학 연구는 문헌이나 기존의 미술사적 연구 성과를 참고하지만, 그에 머무르지 않고 고고학적 해석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