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순흥 벽화 고분 ( )

영주 순흥 벽화 고분 정면
영주 순흥 벽화 고분 정면
선사문화
유적
국가유산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서조도 · 비운문 관련 벽화무덤. 횡혈식석실분.
이칭
이칭
순흥읍내리벽화고분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영주 순흥 벽화 고분(榮州 順興 壁畵 古墳)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85년 11월 07일 지정)
소재지
경북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산29-1번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영주 순흥 벽화 고분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벽화무덤이다. 무덤은 관을 운반하기 위한 널길과 관을 넣는 널방으로 이루어진 횡혈식석실분이며, 벽화는 석회를 바른 네 벽에 그려져 있다. 동쪽에는 새와 산이 그려져 있고 북쪽에는 산과 연꽃 그림, 서쪽에는 양손에 뱀을 휘어 감은 남성, 기와집, 버드나무 등이 있다. 남쪽에는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과 “기미중묘상인명□□(己未中墓像人名□□)”의 묵서명문이 있다. 묵서명문을 통해 추정한 고분의 축조 연대는 539년(법흥왕 26)이다. 유물은 도굴로 인해 인골과 약간의 토기편만 남아 있다.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서조도 · 비운문 관련 벽화무덤. 횡혈식석실분.
개설

1985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85년 7∼8월 대구대학교박물관과 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가 합동으로 발굴 조사하였다. 지리적으로는 풍기읍 내에서 약 6㎞, 순흥면 소재지에서 약 800m 지점으로 소백산맥의 줄기인 비봉산(飛鳳山) 정상에서 서남방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중복 경사면의 해발 430m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내용
  1. 구조

고분의 분구는 원형이지만 지금은 경사진 남면 분구의 유실토가 퇴적되어 남북으로 약간 긴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분구 기저부에는 자연암괴로 호석(護石)이 돌려져 있어, 경사가 급한 남쪽으로는 2∼3단, 동 · 서쪽으로는 1단씩 쌓았고, 북쪽으로 약 1/4부분은 호석을 확인할 수 없다. 봉토 기저부에서 정상까지의 높이는 약 4m이며 봉토의 지름은 14m이다. 봉분은 7∼15㎝ 정도의 황갈색 사질토층과 3∼5㎝의 점토질층을 약 27단 정도 판축(版築)해 축조하였다.

고분의 내부주체인 묘실(墓室)은 현실(玄室)과 현실 남벽의 서쪽에 치우쳐 달려있는 연도(羨道)로 이루어진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이다. 현실의 크기는 동서 3.53m, 남북 2.02m로서 평면이 동서로 긴 장방형을 이루었고 높이는 2.05m이다. 연도는 짧으며, 동서 0.97m, 남북 0.77m이고, 높이는 1.43m이다. 연도의 입구에는 돌문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돌문의 크기는 서쪽이 높이 101㎝, 지름 55∼63㎝이고, 동쪽은 높이 102㎝, 폭이 26㎝로서 부등변사각형의 모양을 하였다.

현실의 내벽은 거칠게 다듬은 크기 약 50㎝×25㎝의 네모진 돌로 서로 맞물려 벽돌쌓기를 해 위로 올라가면서 안으로 굽어들게 쌓은 상협하광(上陜下廣)구조를 하고 있다. 천정석과 벽체의 상부 공간에는 잡석으로 막음을 해 빈 공간을 보강하고 있다. 벽체는 동서 단벽을 먼저 쌓고 남북 장벽을 쌓은 것으로 확인된다. 벽면에는 두께 0. 8∼1. 5㎝정도의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다.

묘실의 천정돌은 2매의 큰 판석을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덮었다. 천정돌 안쪽 면에도 모두 회를 발랐던 것으로 판단되나 현재는 서쪽 천정돌에만 약간의 회가 남아있다. 묘실 바닥에는 1.52m의 여지를 남기고 나머지 바닥에 높고 넓은 시상대(屍床臺)를 만들었다. 시상대의 크기는 동서 2.01m, 남북 2.02m, 높이 0.67m이다. 시상대는 막돌을 쌓아서 만들고 윗면과 서쪽 면에 두껍게 석회를 발랐으며, 서벽과 1.52m 떨어져 있으나 동 · 남 · 북벽과는 벽면과 맞붙어 있다.

시상대 상면과 서측면에는 회칠이 되어있고, 측면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현실 서북쪽 구석바닥에는 시상대의 서측면과 약 20㎝ 간격을 두고 시상대와 비슷한 높이로 막돌을 쌓아 만든 평면 구형(矩形)의 대시설(臺施設)이 있었다. 적석은 상당히 교란되어 있었고, 대의 윗면과 적석 사이에는 많은 양의 인골편(人骨片)이 산란되어 있었다. 묘실 입구 돌문 밖에는 큰 포갠 돌로 7단 정도 차곡차곡 쌓아서 막았다.

  1. 벽화

벽화는 석회를 바른 현실의 네 벽, 연도 좌우벽, 시상대의 측면 등에 그려져 있었다. 먹선으로 윤곽을 잡고 그 안에 붉은색, 노란색 등의 색채를 이용한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을 위주로 하였다. 이 밖에 먹선에만 의존한 백묘법(白描法)도 나타난다. 그리고 북벽의 서측에 그린 연꽃무늬의 경우에는 먹선대신에 주선(朱線)으로 윤곽을 잡고 노란색을 이용해 꽃잎을 그리고 있다. 벽화의 배치 상태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동벽

동벽 오른쪽 윗부분에는 커다란 도굴구멍이 있어 동벽면 전체의 그림은 훼손이 심한 편이다. 남아 있는 동벽의 그림으로는 벽면 북측 상부에 그려진 서조도(瑞鳥圖)와 서조도 아래의 산악도(山岳圖) 일부 뿐이다. 산악도는 고분 내의 여러 산악도 중에서 가장 크게 그려져 있다. 산악그림은 굵은 먹선으로 아래는 수평이 되게 하고 위는 둥글고 원만하게 표현하였으며, 그 안을 주색(朱色)으로 채색하였다. 원근감이 결여된 매우 고졸한 산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서조도는 주둥이를 날카롭게 벌리고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북벽을 바라보고 있다. 서조의 턱 주위로는 담홍색(淡紅色)이 채색된 닭의 벼리같은 것이 표현되어 있고, 활짝 펼친 날개 안에는 전체를 채색하지 않고 날개의 펼친 끝부분에만 담홍색을 색칠해 명암이 드러나게 질감을 표현한 세련된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서조의 날개 밖으로는 3가닥의 굵은 먹선이 둥글게 돌아가고 있는데, 서조가 날개를 퍼득이는 듯한 동적인 표현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1. 북벽

북벽은 대체로 벽면 중간부에서 하단부에 이르는 전 벽면의 석회가 박락되어 이 부분에 그려진 벽화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석회가 남아있는 상부의 그림은 비교적 선명한 편이다. 북벽에 남아 있는 벽화 중 첫 번째 그림은 벽면의 우측 동벽의 산악도에서 연이어진 산악도가 좌측으로 계속 전개되어 가고 있다. 북벽의 산악도는 동벽과 마찬가지로 하단을 직선으로 하고 상단은 삼산형태(三山形態)의 둥근 산봉우리들을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원근법(遠近法)은 사용되지 않았으나 굵은 먹선으로 산의 형태를 그리고 주색으로 채색을 하였으며, 일부에서는 먹선 밖으로 주색이 빠져 나온 부분도 있다. 벽의 중앙부에는 창공에서 하강하는 새 3마리를 선묘(線描) 위주로 아주 단순하게 그려놓았다. 백묘법으로 그려진 이들 3마리의 새 중에서 위쪽에 있는 새는 머리가 유난히 큰 편이고 제일 아래에 있는 새는 날개부분만 남아 있어 자세한 모습을 알 수 없으나 머리는 모두 서쪽을 향해 있다. 산악도 위에는 창공에 홀로 떠 있는 연꽃 한 송이가 그려져 있다.

북벽의 두 번째 그림은 벽면의 서편으로 치우쳐 있는 연화도(蓮花圖)가 군집(群集)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 연화들은 붉은 선으로 윤곽을 잡고, 줄기 등에는 황색을 곁드리고 있다. 연밥과 줄기가 이리저리 피어있고, 약간 오므라든 꽃잎, 측면의 연꽃 등은 상당히 사실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갖게 한다. 이 그림은 도안화된 문양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자생하는 연화를 풍경화(風景畵)식으로 그려놓아 이들 연꽃의 아래 부분에는 연못을 염두에 두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듯 하다. 이러한 연화의 모습은 고구려 후기에 계속적으로 그려진 그림이었으며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연꽃들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한편, 북벽 서측의 연화도 위쪽으로는 비운문(飛雲文)이 큼직하게 그려져 있다. 이 비운문은 3마리의 서조와 같이 서벽을 향해 전개되고 있으며, 그림의 기법은 상당히 입체감을 느끼게 한다.

  1. 서벽

서벽은 북벽과 모서리를 접하고 있으며, 연도의 서벽과 이어져 있다. 서벽의 그림으로는 뱀을 쥔 역사도(力士圖)와 가옥도(家屋圖) 외에 키가 큰 버드나무를 볼 수 있다. 서벽의 북편 모서리에는 장선(長扇)이 그려져 있고 동형의 묵선으로 표현된 여인의 머리모양이 있다. 그 중 여인상은 가슴 위로만 일부 남아 있고 그 아래 부분은 벽화가 박락되어 전체적인 형상은 파악이 불가능하다. 여인상의 얼굴은 갸름하며 1 · 3정도로 고개를 틀어 북벽을 바라보고 있다. 여인상의 좌측에는 또 다른 인물상의 얼굴부분이 어렴풋이 남아 있어서 2명 이상의 여인이 나란히 서있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여인의 머리형태는 높은 머리로서 피어나는 꽃술과도 같이 동글동글한 고리를 여러 개 만들어 천으로 동여맨 듯한 모습이다.

서벽의 여인인물상 남쪽 중앙에는 묘주의 생활상을 그린 가옥도가 배치되어 있다. 가옥도는 상당부분이 위에서 흘러내린 진흙 등에 의해 훼손되어 있으나, 벽화의 경화처리과정에서 훼손된 부분의 그림 일부를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방형의 담장그림은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담장 안에는 2채 이상의 기와집 지붕형태가 어렴풋이 보이고 있으며, 담장 안 남편으로는 천정면에까지 닿을 정도로 큼직하게 그린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버드나무는 선묘 위주로 가지를 사실적으로 축 늘어지게 그려놓았고, 나무의 동체부분은 황색으로 채색해 놓았다. 버드나무는 우리 나라의 벽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그림이다.

버드나무그림의 남쪽으로는 뱀을 진 역사도(力士圖)가 서벽과 연도에 걸쳐서 그려져 있다. 전체적으로는 연도 입구쪽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양손에 뱀을 휘어 감은 모습이다. 상체는 벗고 있으나 하체에는 일종의 잠방이같은 의복을 입고있는 모습이다. 역사도의 크기는 1.45m이며, 앞면 가슴부위, 우측 발 일부만 박락되었을 뿐 거의 완형을 유지하고 있다. 역사도는 전체적으로 묵선으로 형태를 잡고 그 안에는 붉은 색으로 채색하였으며, 하체에 걸친 잠방이는 황색으로 채색하였다.

험상궂게 생긴 얼굴에는 눈이 찢어지듯 그려져 있다. 크게 벌린 입 안으로는 날카롭게 생긴 송곳니가 솟아있는데 치아는 백색의 안료로 채색하였고 입 안은 황색을 칠하였다. 턱에는 세선으로 턱수염을 귀 아래까지 그려놓았다. 머리에는 고깔모자형태 혹은 버선모양으로 된 특이한 모자를 썼는데 모자는 흑색으로 전체를 채색하였다. 머리는 길게 땋아 늘어뜨렸으며 머리 끝부분에는 양파형의 초화형(草花形) 댕기를 매달았고, 댕기부분에는 가는 묵선으로 형태를 잡고 황색을 칠해 놓았다.

뱀은 두 귀가 쫑긋하게 표현되어 있고 뱀의 눈은 생기가 감돌고 있으며 혀를 내어놓고 있는 형상이다. 뱀의 목은 3겹으로 주름져 있으며, 몸통은 흑선으로 형태를 잡고 백색으로 몸을 채색했으나 몸통의 아랫부분은 여백을 남겨두는 공간미를 보여주고 있다. 뱀의 몸통 직경은 5.2㎝이며,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는 215㎝이다.

  1. 남벽

남벽은 석회의 박락이 다른 세 벽에 비해 가장 심해 확인될 수 있는 벽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남벽의 벽화는 연도 상부인 서쪽 끝부분의 벽면과 연도 윗벽에 묵서명문(墨書銘文)과 왼손에 어형기(魚形旗)를 쥐고 있는 인물상의 일부가 남아 있고, 남벽 중앙에는 묵선으로만 처리된 화문(花文)이 일부 남아 있다. 묵서명문은 2열 9자로 내용은 “己未中墓像人名□□”으로 읽혀진다. 여기에서 기미(己未)는 고분의 설치연대로 추정된다. 다음의 묘상인(墓像人)은 무덤의 주인공 혹은 무덤을 조성하고 그림을 그린 사람의 이름 중 하나로 볼 수 있으나, 묘주일 가능성이 높다. 다음의 □□ 중 첫째 자는 좌측이 ‘礻’변이고 우측 상단에 ‘四’까지 읽을 수 있고, 둘째 자는 ‘洋’ 혹은 ‘弟’로 추정되지만 정확성이 없다.

시상대와 연도 동벽 모서리부분에 반라의 인물상이 1구 그려져 있다. 몸체는 주색을 채색하였으며, 가슴부분과 허리 아래부분은 석회가 박락되어 형체를 볼 수 없고 구부린 좌측 팔과 왼쪽 손으로는 윗쪽으로 연결되는 삼지창(三枝槍)의 깃대를 움켜잡고 있다. 삼지창은 끝이 3갈래로 갈라져 있고 연도 북편쪽으로 꼬리가 둘 달린 물고기형태의 기(旗)가 매달려서 휘날리고 있다. 물고기는 꼬리지느러미 부분이 역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서 마치 물 속을 유영하는 듯한 모습이다. 물고기의 입부분은 격자문(格子文)의 망(網)으로 처리해 삼지창의 제일 우측 하단부의 둥근 고리모양 걸쇠에 매달려 있다.

남벽의 중앙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화문은 꽃밥과 수술이 그려져 있고 수술 끝은 둥글게 콩나물 머리모양으로 처리하였다. 그 주위로 묵선의 줄기와 잎 등이 조금씩 보이나 채색의 흔적은 볼 수 없다. 단연생 야생화로 추정된다.

  1. 연도 동벽

연도 동벽은 매우 짧은 편으로 가로 0.7m, 높이 1.5m의 작은 벽면을 이루었으며 입구쪽으로 향하고 있는 인물상이 일부 그려져 있다. 벽화의 상당부분은 진흙에 덮어져 있고 하반신은 석회의 박락으로 완전한 모습을 구할 수는 없지만 반라(半裸)로 된 상반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꼬불꼬불한 머리카락, 찢어질 듯한 눈, 크게 벌린 입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이빨, 크게 표현된 코 등을 볼 수 있다. 몸 전체는 주색으로 채색했으나 힘을 준 근육을 나타내기 위해 진한 주색으로 여러 줄의 선을 그어 힘있는 역사상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상반신의 좌측으로는 흰색 천으로 위에서 밑으로 가리고 있으며 우측 허리부분으로는 매듭을 둘러 하체부로 연결하였다.

  1. 시상대 측면

시상대의 서측면에 그려진 그림은 일종의 반절(半切)된 연화문을 도식화해 전개시켜 놓은 듯한 태형(太形)의 문양을 연속적으로 시문하였다. 제일 아랫쪽은 반원의 주색 태선(太線)이 2겹 돌아가며 그 위로 끝이 뾰족한 삼각문(三角文)이 연결되어 반원의 테두리 밖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 끝에 그려진 굵은 점은 콩나물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해 마치 산봉우리에 나무가 서있는 느낌을 풍기고 있다.

태형의 문양은 시상대 서측면 남쪽에 1매, 중앙에 1매가 있다. 그 위쪽 밖으로는 올록볼록하게 묵선으로만 처리해 꽃잎을 표현한 듯한 느낌을 주는 선들이 연접되어 있다. 시상대 북측면과 현실 남벽이 마주치는 모서리 부분에는 남벽에 그려진 창을 쥐고 있는 인물상의 옷자락이 시상대 전면에까지 흘러 내려와 그려져 있다. 곡선의 가는 묵선이 반절된 연화문 위로 그려져 있어 시상대의 그림을 먼저 그리고 남벽의 인물상을 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묘실 내부에서 수습된 유물은 토기편 약간이 있다. 인골은 시상대 위에서 2개체분, 서북쪽의 대 위에서 5개체분이 되지만 그 외의 유물은 도굴에 의해 없어진 상태였다. 고분의 축조연대는 묵서명문의 기미중(己未中)을 참고해 일단 539년(신라 법흥왕 26)으로 추정하였다.

참고문헌

『순흥읍내리벽화고분발굴조사보고서』(대구대학교 박물관, 1995)
『순흥읍내리벽화고분』(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6)
집필자
김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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