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공주(貞孝公主)는 제3대 문왕(文王)의 넷째 딸로서, 757년에 태어나 792년 6월에 3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 무덤은 1980년과 1981년 두 차례 발굴되었다. 무덤 방향은 남북향이고, 남북 길이 약 15m, 동서 너비 약 7m이다. 벽돌과 판석으로 쌓았으며, 묘도(墓道) · 묘문(墓門) · 널길〔羨道〕 · 널방〔墓室〕 · 탑〔塔〕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도는 남쪽에 계단식으로 두 번에 걸쳐 만들었다. 묘문은 벽돌로 쌓아 막았고, 그 뒤에 널길이 있다. 중간에는 판석과 나무로 만든 이중의 문이, 문 뒤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널방 바닥은 지표에서 약 3.4m 되는 깊이에 있었다. 이는 남북 3.1m, 동서 2.1m이고, 4벽의 높이는 1.4∼1.66m 사이로 일정하지 않다. 널방 가운데에는 남북 2.4m, 동서 1.45m, 높이 약 0.4m의 벽돌로 쌓은 관대(棺臺)가 있었다.
관대의 남쪽 측면에서 사자머리 같은 그림이 확인되었다. 무덤에서 남녀 각 1인의 인골(人骨)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곳에 공주와 남편의 관이 각각 올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벽은 벽돌로 쌓았고, 그 위에 벽돌과 장대석을 쌓아 계단식으로 공간을 줄여나갔다. 그 뒤에 몇 개의 판석을 동서 방향으로 덮은 말각조정 천장을 만들었다. 따라서 벽돌로 무덤 벽을 쌓는 당나라 양식과 돌로 공간을 줄여 나가면서 천장을 쌓는 고구려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탑은 이미 무너져 기초만 남아 있다. 기초 부분은 널방과 널길 위에 방형에 가깝게 축조했고, 그 안에 있는 방형의 빈 공간에는 점토와 자갈로 채워져 있었다. 제일 아래쪽의 기초 부분은 남북 5.65m, 동서 5.5m이고, 내부 공간은 남북 2.7m, 동서 2.6m이다.
그 위에 점토와 자갈로 쌓은 층이 있고, 다시 탑의 기초를 쌓았다. 두 번째 탑의 기초 부분은 남북 6.8m, 동서 6.7m이고, 내부 공간은 남북 2.8m, 동서 2.7m이다. 이렇게 무덤 위에 탑을 쌓는 방식은 발해 무덤에서만 보인다.
이 무덤은 일찍이 도굴되어 유물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발굴 과정에서 벽화와 묘비(墓碑)를 비롯해 도용(陶俑) 조각, 도금한 구리 장식품과 구리못, 쇠못, 칠기 조각, 글씨가 새겨진 벽돌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벽화와 묘비이다. 널길의 동 · 서벽과 널방의 동 · 서, 북벽에 그려진 12명의 인물도(人物圖)는 처음으로 발해인(渤海人)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무사(武士) · 시위(侍衛) · 내시(內侍) · 악사(樂師)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평소에 공주를 시중들던 사람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공주의 모습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인물들은 대체로 뺨이 둥글고 얼굴이 통통해 당나라 화풍을 반영하고 있다.
묘비(墓碑)는 1980년 발굴시에 완전한 모습으로 발견되어, 연변조선족자치주박물관(延邊朝鮮族自治州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무덤 앞에는 무덤을 관리하던 건물터가 남아 있고, 산 아래에는 능사(陵寺)로 보이는 절터도 발견되었다.
비문은 앞면에만 모두 18행 728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중 719자가 판독 가능하다. 비문에서는 『상서(尙書)』 · 『춘추(春秋)』 · 『좌전(左傳)』 · 『시경(詩經)』 · 『역경(易經)』 · 『예기(禮記)』 · 『맹자(孟子)』 · 『논어(論語)』등과 같은 다양한 중국의 유교 경전과 역사서들을 두루 인용하고 있으며, 변려체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비문에서는 발해 국왕과 공주의 덕을 칭송하며 유교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어, 문왕(文王) 시대 이후 발해 사회에 유학(儒學)이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유학의 영향은 정효(貞孝)라는 공주명을 비롯해 발해 왕들과 귀족들의 이름에 유교적 덕목인 충(忠), 인(仁), 의(義), 신(信), 효(孝) 등의 가치가 반영된 점에서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