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조선고적연구회의 일본인 학자들이 내리고분군을 조사하였을 때 발견되었다. 당시의 지명은 평안남도 대동군 시족면 내리였으므로 고분의 명칭이 ‘내리 제1호분’으로 되었다. 산록 구릉지대 낮은 경사면에 조영된 30여 기의 고분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내리 제1호분은 방대형의 봉토분으로 봉토가 동서 지름 약 20m, 남북 지름 약 24m, 높이 4.5m이며, 내부구조는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남향의 외방무덤〔單室墓〕이다. 널방은 깬돌으로 축조하였다. 널방은 정방형이며 각 벽의 길이는 약 3m, 높이는 3.3m 가량이다. 널방 천장은 넓은 판석을 이용해 평행굄 3단, 삼각굄 1단의 평행삼각굄으로 하였다.
벽화는 널방 내부에 면회를 입힌 뒤 그 위에 그렸으며 주색·갈색이 주종이다. 널방 벽화는 대부분 떨어져나갔으나 동벽과 북벽 일부에 남은 벽화의 흔적으로 보아 사신(四神)이 중심화제이다. 천장부에는 각종 문양과 해모양〔日象〕·달모양〔月象〕 및 산악을 그렸다. 널길에는 벽화가 없다.
널방 동벽의 청룡은 몸체 뒷부분과 계단식으로 꺾이며 뒤로 뻗어나간 꼬리가 희미하게 남아 있고, 빈 공간 일부에 비운문(飛雲文)의 흔적이 보인다. 북벽의 현무는 거북의 귀갑문과 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천장부의 벽화 역시 떨어져나간 부분이 많으나 남은 부분은 비교적 선명하다.
천장부 1층 평행굄에는 인동무늬〔忍冬文〕와 산악을, 2층에는 동서에 해모양·달모양과 남북에 고리무늬〔環文〕를 좌우에 거느린 연꽃무늬〔蓮花文〕를, 3층에는 연속인동당초무늬를, 4층 삼각굄에는 인동무늬를 장식하였다.
1층 평행굄 동북벽과 서북벽 이음새에 그려진 2폭의 산악도는 중앙에 삼산(三山)형태의 산을 그리고 능선 기슭에 암산형 산봉우리와 소나무로 보이는 수목을 배치하였다. 이 산악도는 배경으로서가 아닌 독립된 산수화의 면모를 보여준다.
내리 제1호분의 산악도는 강서대묘의 산악도 및 백제 산경문전의 산악도와 함께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의 한국 고대 산수화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2층 평행굄의 연꽃무늬는 와당의 연꽃과 유사한 단순화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남벽의 것은 백제 능산리벽화분 천장의 연꽃무늬와, 북벽의 것은 신라 순흥 어숙묘 천장의 연꽃무늬와 유사하다. 이로써 고구려와 백제·신라 사이의 활발한 문화적 교류와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연꽃무늬 좌우의 고리무늬는 환문총(環文塚) 및 쌍영총(雙楹塚)의 것과 같은 형태이나 컴퍼스를 이용해 보다 정확한 동심원을 긋고 있는 점에서 발전된 면모를 보인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널방의 구조와 벽화에 보이는 사신도·산악도와 인동당초무늬의 세련된 표현으로 보아,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