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장 ()

선사문화
개념
삼국시대 왕과 귀족 등 권력자가 사망하여 무덤에 매장될 때 그에 종속되어 있던 사람을 함께 죽여 매장하는 장례 풍습.
내용 요약

순장은 왕과 귀족 등 권력자가 사망하여 무덤에 매장될 때 그에 종속되어 있던 사람을 함께 죽여 매장하는 장례 풍습이다. 순장은 세계사적으로 권력이 집중되거나 국가가 발생하는 단계에 출현하였다. 고대 한반도에서는 3세기 후반 금관가야에서 처음 출현하였으며, 5세기에 아라가야, 대가야, 비화가야, 신라 중앙과 지방으로 확산되어 다양한 양상으로 성행하다가 6세기 중엽에 소멸되었다.

정의
삼국시대 왕과 귀족 등 권력자가 사망하여 무덤에 매장될 때 그에 종속되어 있던 사람을 함께 죽여 매장하는 장례 풍습.
순장의 출현과 사회적 의미

순장은 왕과 귀족 등 권력자가 사망하여 무덤에 매장될 때 그에 종속되어 있던 사람을 함께 매장하는 장례 풍습으로, 죽음 후의 내세(來世)를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었던 권력자의 존재와 신분제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세계사적으로 고대 중국, 인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로마 등 동서양의 선진 문명권을 비롯하여 아메리카 대륙, 남태평양의 섬 등에서도 널리 행해졌으며, 특히 권력이 집중되거나 국가가 발생하는 단계에 출현하였다.

순장이 고대 사회에서 시행되기 위해서는 차별적 신분 구조와 지배체제가 갖춰져야 하며, 내세관에 의한 묘장제도(墓葬制度)가 확립되고, 강제로 사람을 죽여 장례를 치르는 데 대한 사회적 용인이 필요하다.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어야만 순장은 비로소 장례 풍습으로 제도화될 수 있었다.

순장 제도의 여부는 고대 사회의 발전 단계를 설명할 때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며, 순장이 존재한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덜 발달되거나 미성숙한 사회로 인식되기도 한다.

고대 한반도의 경우, 신라와 가야는 순장이 널리 성행한 데 비해 고구려, 백제는 순장이 시행되지 않았는데, 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 중원과의 빈번한 문물교류를 통해 순장이 좋지 못한 장례 행위임을 인식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문헌에 기록된 순장

고대 한반도의 순장은 『삼국지(三國志)』 등에 부여의 순장, 『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의 순장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이 중 부여의 순장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 부여조(夫餘條)와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부여국조(夫餘國條)에 기록되어 있으며, 부여에서는 귀인(貴人)이 죽으면,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많을 때는 백 명이나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진서(晉書)』 열전(列傳) 부여국전(夫餘國傳)에 부여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산 사람으로 순장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부여에 순장이 있었음은 분명해 보이나, 중국 길림성(中國 吉林省) 모아산고분군(帽兒山古墳群)을 비롯한 부여의 주요 고분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는 100여 명에 이르는 순장자가 확인된 사례는 아직 없다.

신라의 순장은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지증마립간조(智證麻立干條)에 "3년(502) 봄 3월에 명령을 내려 순장을 금하였다. 그 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 순장하던 것을 이때에 이르러 이를 금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6세기 초 신라 최고 지배자의 무덤에 10명이 순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 자료로 본 순장

순장 무덤의 조건

고고학 발굴 조사에서 순장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무덤 내 복수의 피장자 간 동시성, 강제성, 종속성의 조건이 확인되어야 한다. 즉, 무덤의 주인과 순장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동시에 매장되어야 하고, 순장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고착화된 관념에 의해 강제로 살해, 매장되어야 하며, 무덤의 주인과 순장자 간 분명한 신분의 차이가 인정되어야 순장 무덤이라 할 수 있다.

순장의 출현과 확산

고대 한반도 순장의 증거는 가야와 신라가 자리하였던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확인된다. 발굴 조사 성과로 보아 순장이 가장 먼저 출현한 곳은 금관가야의 중심 고분군인 김해 대성동 고분군으로, 가장 빠른 순장묘는 3세기 후반에 조성된 대성동 29호분이다.

그 출현 배경으로는 북방[부여] 등 외부로부터 도입된 것이라는 의견과 전쟁포로의 증가, 농업생산력의 발전, 인신공희(人身供犧) 관념의 형성으로 자연 발생했다는 의견 두 가지로 나뉜다.

어느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덧널무덤의 규모가 급격히 커지고 외래계 물품을 비롯한 부장품이 풍부해지는 등 금관가야 내 지배 권력이 집중되고 엘리트 계층이 성립되던 시기에 순장이 출현한 것은 분명하다.

4세기대가 되면 금관가야 지배집단이 조성한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순장이 성행하며, 5세기대에 들면서는 대가야(고령), 아라가야(함안)를 비롯한 가야권과 경주, 경산 등의 신라권으로 널리 확산된다. 이 시기는 덧널 또는 돌덧널 구조의 대형 매장부를 높은 봉토로 덮은 고총고분(高塚古墳)이 출현하던 때로, 순장의 확산은 지배 권력의 성장과 정치체 간의 상호작용에 따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야와 신라의 순장

여러 가야와 신라의 순장은 무덤 구조와 부장품의 차이만큼이나 다양한 양상으로 확인되며, 이를 통해 각 나라마다 순장에 대한 관념과 시행 방식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가야의 순장

금관가야의 순장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 김해 양동리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확인되며, 3세기에 처음 출현하여 5세기 전반까지 성행하였다. 대성동 고분군의 경우, 처음에는 최고 지배층 무덤에 1명 정도의 순장이 이루어지던 것이 4세기부터는 상위 지배층의 무덤으로까지 확대되고 순장자 또한 최대 8명으로 늘어난다.

순장자는 덧널 구조인 주곽과 부곽, 충전 공간 등에 매장되며, 무덤 주인의 발아래에 배치되다가 점차 좌우 배치로 변화하였다.

아라가야의 순장은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서만 확인되며, 5세기 전반에 출현하여 후반에 성행하다가 6세기 전반이 되면 쇠퇴한다.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1~5명을 순장하였으며, 너비가 매우 좁은 아라가야식 돌덧널 구조로 인해 순장자는 무덤 주인의 발아래 공간에 나란히 매장되었다.

대가야의 순장은 고령, 합천, 함양 등 대가야권의 여러 지역에서 확인되며, 그중 대가야 지배 집단이 조성한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5세기 전반에 출현하여 6세기 전반에 가장 성행한다.

대가야 순장의 가장 큰 특징은 무덤 주인이 매장되는 주곽과 유물 부장 공간인 부곽 외에도 순장자를 매장하기 위한 순장곽을 별도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순장곽은 처음에는 주곽과 부곽의 충전 공간에 배치되다가 점차 주곽과 부곽 밖으로 나오며, 순장이 성행하는 6세기 전반에는 주곽을 원형으로 감싸듯이 배치된다.

이 시기의 대가야 왕묘인 지산동 44호분의 주곽, 부곽 2기, 순장곽 32기에는 모두 40여 명에 이르는 순장자가 매장된 것으로 복원되어 같은 시기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순장묘로 알려져 있다.

비화가야의 순장은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창녕 계성 고분군 등의 돌덧널무덤돌방무덤에서 확인되며,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시행되었다. 순장자는 2~4명이 무덤 주인의 발 아래 공간에 매장되었는데, 송현동Ⅰ지구 15호분에서 확인된 순장인골 4개체 중 무덤 주인으로부터 가장 멀리 매장되었던 여성 순장자가 ‘순장소녀 송현이’로 복원되었다.

신라의 순장

신라의 순장은 중앙[왕경]과 지방으로 나뉜다. 왕경인 경주에서는 5세기 전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처음 확인된다. 순장자는 덧널 내부가 좁아 덧널 상부나 주변 석단에 배치하였다.

경주에서 가장 큰 봉토를 가진 황남대총[황남동 98호분] 남분의 경우, 발굴 당시 석단에서 순장자 1개체의 치아만 확인되었으나, 귀걸이 등 장신구의 배치와 무덤 공간을 고려한 연구에서 9~10명이 순장된 것으로 복원되어 『 삼국사기』 의 신라 순장 기록이 사실인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 경주 쪽샘 유적의 중소형급 고분에서도 순장이 확인되고 있어 신라 역시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순장 규모가 비례하여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지방으로서 순장이 확인된 지역은 경산, 대구, 의성, 성주, 영덕, 양산 등이다. 그중 순장묘가 30여 기나 발굴되어 신라 순장을 잘 알 수 있는 유적은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이다. 여기에서 4세기 덧널무덤 순장이 확인되었으나, 금관가야를 제외한 유일한 사례여서 당시 순장이 장례 풍습으로 제도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순장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5세기 전반 고총고분이 조성되면서부터로 순장자는 주곽과 부곽에 2~7명이 매장되었다.

순장의 소멸

고대의 순장은 내세관의 변화나 새로운 사상, 관념의 도입에 따라 점진적으로 소멸되거나 권력자 또는 정복자에 의한 장례 행위의 제한으로 인해 급진적으로 소멸되기도 한다.

아라가야의 경우, 6세기 전반 순장의 쇠퇴 양상이 점진적으로 확인되어 관념의 변화에 따라 소멸한 반면, 대가야는 순장의 규모나 배치가 가장 발전한 단계에서 562년 신라의 정복에 의해 갑자기 소멸되었다.

신라의 경우, 지증왕의 502년 순장 금지령에 따라 왕경에서는 갑자기 중단되나 지방인 경산, 양산 등에서는 계속 시행되며, 지방관 파견으로 지방에 대한 직접 지배체제가 확립되는 6세기 중엽이 되면 순장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한편, 고대에는 순장의 시행이 중단되더라도 내세관에 의한 묘장제도는 그대로 유지되므로 무덤 주인에게 봉사의 의무를 지닌 대상은 여전히 필요하다. 이에 사람을 직접 순장하던 것을 대신하여 목용(木俑)이나 도용(陶俑)을 부장하기 시작하며, 중국 산서성(中國 山西省) 장자 우가파(長子 牛家坡) 7호의 목용과 진시황릉의 병마용이 대표적이다.

신라 왕경인 경주에서도 7~8세기 조성된 용강동 석실분과 황성동 석실분에서 남성과 여성을 형상화한 도용이 출토되었다. 이는 순장이 완전히 사라진 후 1~2세기가 지나 돌방무덤에 도용이 부장된 사례로, 순장 소멸 직후부터 계기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어서 과연 순장을 대신한 것인지 단정할 수는 없다.

순장 무덤의 주인과 순장자

순장을 시행할 수 있었던 무덤의 주인은 가야와 신라의 지배층으로서, 다양한 규모의 무덤에서 순장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최고 지배자인 왕뿐만 아니라 상하위의 귀족들도 내세의 삶을 위해 순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순장자는 무덤 내 매장 위치와 귀걸이, 목걸이 등 장신구, 손칼, 낫 등 도구, 무기, 말갖춤, 토기 등을 착용 또는 소유한 것으로 보아 무덤 주인의 곁에서 이를 보필하던 사람[近侍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신분은 주인의 시중을 들던 여성[婢妾], 시종, 시녀, 시동 등 가내 노동자와 무사, 마부, 창고지기 등으로 무덤 주인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순장자의 인골이 좋은 보존 상태로 출토되면 형질 분석을 통해 성별, 연령, 질병력, 출산력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가야, 신라 순장자의 성별은 금관가야, 아라가야가 여성의 비율이 높고, 대가야, 비화가야, 신라[경산]는 남녀가 거의 같은 비율이다. 연령은 10대 후반~30대가 대부분이며, 드물게 유소아와 노년층이 있다. 가벼운 영양 결핍이 확인되지만, 노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중병을 앓은 순장자는 거의 확인되지 않으며, 출산을 경험한 기혼 여성도 순장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최근 과학 분석을 통한 mtDNA, 친연관계, 식성, 인체복원 등 순장인골을 통한 다양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가야 사람 복원 연구(2009)를 통해 ‘16세 순장소녀 송현이’가 복원되었으며,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의 순장인골을 대상으로 한 차세대 염기서열분석(NGS) 기법의 새로운 연구 시도(2020)는 향후 고대 한반도 순장을 규명하는 데 획기적인 정보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후한서(後漢書)』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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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골, 고대 압독 사람들: 압독국 문화유산 연구 · 활용 프로젝트』(영남대학교 박물관, 2020)
『1500해 앞 16살 여성의 삶과 죽음: 창녕 송현동 15호분 순장인골의 복원연구』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09)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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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영, 「고대 영남지방의 순장」(『한국고대사논총』 4, 한국고대사회연구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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