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창녕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은 해발 757m 화왕산의 정상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려오다 목마산성이 입지한 해발 463m 목마산 산록일대에 만들어진 삼국시대 무덤군이다. 송현동고분군은 목마산의 남서쪽 구릉 말단부와 남동사면 일대에 50여 기가 분포되어 있으며, 교동고분군은 목마산성의 북서쪽에서 남동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정선을 따라서 90여 기가 있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에서 확인되는 내부구조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도 있지만, 대부분은 추가장이 가능한 횡구식석곽(橫口式石槨)을 매장주체부로 하였고, 석곽의 평면은 세장방형이 대부분이다.
일제강점기때인 1910년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방문하여 목마산성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던 고분을 처음 소개하였다. 이후 1917년 9월이마니시 류(今西龍)가 고분의 분포 및 수습조사를 하였고,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과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의 21호분과 31호분 발굴, 다니이 사이이치(谷井濟一)의 5호분, 6호분, 7호분, 8호분, 89호, 10호분, 11호분, 12호분, 91호분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해방 후 경작과 도굴 등으로 파괴되다 1963년 1월 21일에 창녕교동고분군과 창녕 송현동고분군은 사적으로 각각 지정되었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은 1980년대 후반부터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조사되어 2011년 7월 28일 두 고분군의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사적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으로 재지정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목마산성의 서록에 분포하고 있는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은 적석목곽묘인 교동12호분을 제외하면 대체로 횡구식석곽묘를 매장 주체부로 사용하였다. 송현동고분에는 6, 7호분이나 16, 17호분처럼 표형분이 확인되지만 교동고분군에는 7호분, 89호분 등과 같이 대형고분을 중심으로 중소형분이 배치되는 현상을 보인다. 내부구조는 중앙에 관대를 놓고 관대의 앞뒤로 유물장칸과 순장자 공간을 마련하였다. 출토유물은 은제조익형 관모 앞 장식, 은제 심엽형 대금구, 삼엽문환두대도 등과 같은 경주계 금공품을 부장하고 있다. 송현동 7호분에는 녹나무로 만든 배모양의 통나무관을 사용하였으며 15호분의 횡구부에서 발견된 순장 인골은 16세의 여성으로 복원하여 송현이로 명명하였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은 하나의 봉토 아래에 1기의 무덤주체부를 가지고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출토유물에서는 고배를 비롯한 토기들은 기본적으로 신라양식(新羅樣式)에 속하지만 창녕형식이 강하게 나타나는 시기와 경주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시기로 나누어진다. 장신구를 비롯한 금공품도 대체로 경주적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어서 큰 틀에서 보면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은 신라의 한 지방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자료로 판단되며, 외래계로 볼 수 있는 대가야계의 귀걸이이나 왜(倭)로부터 입수한 녹나무로 만든 관(棺)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 비자벌(比子伐: 경상남도 창녕군의 옛 이름)의 지정학적 중요성, 지역간 교류 등을 이해 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