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은 금호강의 지류인 오목천과 남천의 사이에 형성된 해발 50∼70m정도의 얕은 구릉에 입지하고 있는데, 가장 서쪽에 남북으로 말안장처럼 뻗은 구릉정상에 위치하는 임당토성(林堂土城)을 중심으로 그 남서쪽에 임당동 고분군, 북동쪽으로 구릉을 달리하여 조영동 고분군, 부적동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내부구조는 대체로 청석인 기반암(基盤巖)을 파고, 그 안에 목곽(木槨)을 안치한 목곽묘이며, 적석목곽묘, 횡혈식석실묘, 석곽묘, 옹관묘 등도 다수 확인되었다.
2011년 사적으로 지정된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고분군은 1918년 압량읍 대동․조영동 고분군으로 알려졌지만 해방 후까지도 학계의 관심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1982년 1월 15일 임당동에서 도굴된 유물이 해외 밀반출 과정에서 적발되어 수습차원에서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주목받게 되어 1983년 2월 3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85년에 들어오면서 조영동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1989년 8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두 고분군은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2011년 7월 28일 이 두 개의 고분군을 하나로 통합하여 사적으로 재지정하였다.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고분군은 토성과 주거지를 세트로 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고분 가운데 대형분은 구릉의 정선부(頂線部)를 따라 축조하였고 소형고분은 구릉사면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소형분들은 대체로 단곽분에 속하지만 정선부에 만들어진 대형분은 주부곽식묘곽(主副槨式墓槨)을 매장 주체부로 사용하고 있다. 시기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속하는 G지구5․6호분과 5세기중엽에 비정되는 조영CⅡ-2호분에서 보이는 경주식의 적석목곽분이 5세기말에서 6세기초로 넘어가면서 소멸하고, 주부곽식을 가지는 목곽묘 특히 일열부곽식(一列主副槨式墓)가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다. 임당동과 조영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경주적 양식을 따르는 토기를 비롯하여 출자형 입식을 가지고 있는 금동관(金銅冠), 새 날개꼴의 장식을 가진 관모장식[冠飾], 장식성이 매우 강한 대도(大刀), 허리띠장식[帶金具], 금동제의 신발[飾履] 등이 세트를 이루어서 부장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고분군은 구조가 일열주부곽식묘(一列主副槨式墓)라는 점과 금공품의 형태 등에서 신라와 매우 친근한 사람들의 무덤으로 규정된다. 곧 출자형 입식을 가진 금동관을 비롯하여 귀걸이, 관모 앞 세움장식인 관모전입식(冠帽前立飾), 허리띠장식, 장식 신발[飾履] 등에서 특히 경주적 성격을 강하게 보이고 있는 점에서 신라의 한 지방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자료를 제공할 수 있는 중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