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2월 16일에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2월 26일에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계성고분군은 흔히 비화가야(非火伽耶) 혹은 비사벌(比斯伐)로 불리던 소국의 중심고분군으로 알려진 창녕읍의 교동고분군에 버금가는 대고분군으로 영취산에서 서북쪽으로 뻗어나간 지맥의 말단부 계성평야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형성된 것이다.
이 고분군에 대한 최초의 조사는 일제시대 조선고적조사위원회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현상을 파악하면서 뚜렷한 봉분을 지닌 고분만 21호까지 호수를 부여하였다. 그 다음으로 1967년 11월에 큰무덤 1기가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 주관으로 발굴조사되었고, 이어 영남대학교 박물관이 1968년과 1969년에 걸쳐 계남리 1호분과 4호분을 발굴조사하였다.
이후 1976년 구마고속도로가 개설될 때 도로부지 내에 있던 무덤 49기가 경상남도 주관으로 발굴조사되었고, 다시 고속도로와 국도가 확장되면서 1994년과 1998년에 사리와 명리의 중 · 소형 봉토분과 소형분들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영남대학교에서 조사한 계남리 1호분은 봉분의 직경이 47m이고 4호분은 21m로 모두 대형봉토분에 속한다. 매장시설은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副槨]이 일(日)자형으로 배치된 주부곽식(主副槨式) 돌덧널이며, 지표상에 구덩식돌덧널[竪穴式石槨]을 축조하면서 동시에 봉토를 쌓아올려 조영한 고분이다. 사리고분군은 1970년대와 1990년대에 이루어진 2차례의 발굴에서 6세기 전반부터 7세기대까지 조영된 고분군임을 알 수 있다. 명리고분군은 6∼7세기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중형봉토분 6기, 기타 삼국시대 무덤 14기, 조선시대 움무덤 3기, 성격을 알 수 없는 건물지와 가마터 3기가 확인되었다.
명리 일대에서 조사된 고분들 중에서 규모가 크고 잔존상태가 양호한 것은 굴식이며,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墳]은 소형유구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명리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는 경남고고학연구소와 호암미술관에 의해 4지구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그 중 Ⅰ지구에서는 중형의 봉토분과 다양한 구덩식돌덧널무덤이 조사되었다. 봉토는 직경 7m정도에 높이 1m 가량이 남아 있었다. 냇돌을 이용하여 장방형의 덧널을 축조하고 지형에 따라 한쪽 단벽에 입구와 무덤길을 마련하였다. 덧널 바닥에는 냇돌이나 풍화암반편으로 주검받침[屍床]을 마련하였다. 봉토 가장자리에는 호석(護石)을 두르고 원형 혹은 반원형의 도랑을 돌렸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무덤의 구조는 냇돌을 사용하여 세 벽과 천장을 판상석(板狀石) 여러 개를 덮어 마련한 뒤 나머지 벽을 통하여 관을 넣어 막음으로써 완성되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네 벽을 마련한 뒤 위에서 시신을 넣고 판상석 여러 장으로 위를 덮어 천장으로 하여 무덤을 완성하는 구덩식돌덧널무덤, 이러한 형태의 것이 한 봉토 내에 두개 이상 있는 여러덧널무덤[多槨墓], 항아리 두 개를 연결하여 마련한 독무덤[甕棺墓]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무덤형식이 공존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계성고분군의 무덤구조와 출토 유물을 통해볼 때, 이 고분군이 위치한 지역이 가야시대 전성기를 거쳐 통일신라시대까지 정치 · 문화의 중심지였던 점에서, 가야시대에서 통일신라기에 걸쳐 계속 조성되고 축조된 고분군임을 알 수 있다.
출토유물로 보아 사리 · 명리 일대의 고분은 6∼7세기대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지역 고분문화 후기에 있어서 중심고분군의 변천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된다. 특히 이 일대의 고분에서는 명문토기(銘文土器)가 많이 출토되어 주목되고 있는데, ‘대간(大干)’명 항아리 뚜껑과 항아리는 지금까지의 명문토기가 굽다리접시나 긴목항아리에 국한되는 현상과 견주어 본다면 명문 해석에 있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