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고아리 벽화 고분은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에 있는 연꽃무늬 벽화가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무덤이다. 이 무덤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널방과 널길이 있는 ㄱ자 형태의 굴식 돌방무덤이다. 널방과 널길 천장돌에 연꽃무늬 벽화가 남아 있다. 벽화가 있는 점에서 백제 묘제와의 관련성이 있고 고령에서 무주, 금산, 논산평야를 통하는 가야와 백제의 문화 교류를 보여주고 있다. 벽의 아치형 축조 수법, 바닥의 도량 설치 등 백제의 고분 축조 양식과 공통되는 부분이 존재하여 가야에 미친 백제문화의 영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지정된 벽화 고분의 봉토는 동서 약 25m, 남북 약 20m, 높이는 구릉 아래쪽인 남쪽이 7m, 위쪽인 북쪽이 2.5m 정도이며, 발견 당시 북쪽과 널방 서벽 위쪽에는 도굴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조는 동서 2.8m, 남북 3.7m의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널방과 남벽의 동쪽편에 너비와 높이가 각 1.2m, 길이 3.2m의 널길이 달려 있는 ㄱ자형 돌방무덤이다. 돌방 둘레에는 동서지름 18m의 둘레돌[護石]을 돌렸다.
돌방의 남북 두 벽은 수직이지만, 동서 두 벽은 위쪽을 서로 안으로 기울게 쌓았고, 맨 위에 천장돌 4매를 일렬로 덮어 굴천장형으로 만들었다. 널방은 모두 대소 각양의 돌로 쌓았으며, 겉에 조갯가루 회칠을 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으나 회는 거의 탈락되어 없어지고 널길과 널방의 천장에만 약간 남아 있다.
널방의 바닥에는 남북 방향으로 두 개의 널받침이 만들어졌고, 관대 아레에는 널방 바닥의 가장자리를 따라 내부를 자갈돌로 채운 너비 28㎝, 깊이 22㎝의 배수로가 돌아간다. 널받침은 납작돌을 깔고 고운 흙과 회칠을 한 것으로, 높이는 9㎝ 정도인데 서쪽 것이 길이 2.8m, 너비 1.3m로서 동쪽 널받침(2.8m×0.86m)보다 약간 크고, 또 먼저 만들어진 것이다.
피장자는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서쪽 널받침에 남자가, 동쪽 널받침에 여자가 안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여자가 남자의 왼쪽에 있다는 점에서 공주 무령왕릉의 경우와 같다. 널길 입구는 큰 돌로 막았다.
벽화의 흔적은 널방의 벽면에도 약간 남아 있으나 전혀 형체를 알 수 없고, 널방의 천장돌과 널길의 천장돌에 연화문이 남아 있을 뿐이다. 널방 천장돌은 엷게 회칠을 하고 그 위에 갈색 · 녹색 · 홍색 · 백색으로 연화문을 그렸고, 7매로 된 널길의 천장돌에도 회칠을 하고 지름 약 26㎝, 8판(八瓣) · 복판(複瓣)의 연화문이 그려진 11개의 돌로 짰다. 꽃과 꽃 사이의 공간에는 갈색 · 녹색 · 홍색의 삼색으로 구름 또는 유수(流水)같은 곡선문을 그렸다.
이 고분은 굴형 널방의 구조면에서 공주 무령왕릉과 통할 뿐만 아니라, 벽화가 있는 점에서 백제묘제와의 관련을 말해 주고 있으며, 고령에서 무주-금산-논산평야로 통하는 백제∼가야통로를 통한 문화교류를 보여 주고 있어 중요하다.
그리고 이 고분은 벽면 회칠의 조사를 통해 덧칠〔改粧〕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고분은 모두 세 번에 걸쳐 칠해졌는데, 즉 고분축조할 때, 서관대(西棺臺)에 매장할 때, 동관대에 매장할 때에 이루어졌다.
이런 점으로 미뤄볼 때 이 고분이 첫 번째 피장자의 생존 당시에 세워진 수릉(壽陵)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모두 3년장이었기 때문에 피장자의 사망과 동시에 건조되어도 본장(本葬) 때는 벽면 개수가 필요해질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유물은 도굴되어 없었으며 호암미술관 소장의 가야금관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금동안장장식이 이 고분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 있으나 확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경북대학교에 의해 조사된 폐고분은 발견 당시 봉토의 꼭대기와 남쪽 경사면이 무너져 있었다. 고분의 구조는 동서 4.8m, 남북 3.5m의 동서로 긴 널방과 동벽 중앙에 너비 1.1m, 길이 4.3m의 널길이 달려 있는 굴식 돌방무덤이다.
돌방 주위에는 둘레돌을 돌렸던 흔적이 남아 있다. 돌방의 벽은 장방형의 깬돌로 쌓았는데, 6m 높이까지는 수직으로 올라갔고 그 위는 차차 안으로 기울게 쌓았으나 천장이 무너져 있어 더 이상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