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이루어졌으며 그림으로 표현되는 일이 많았다. 서양에서는 구석기시대의 동굴 벽화에 수렵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청동기시대의 동물문견갑(動物文肩甲)에 화살 맞은 사슴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울주 반구대(盤龜臺)의 바위 표면에 그물 속에 잡혀 있는 동물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 가장 오랜 예들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수렵도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 있다. 무(武)를 중시하였던 고구려는 수렵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이러한 배경에서 수렵도가 종종 그려졌다. 덕흥리고분(德興里古墳), 약수리고분(藥水里古墳), 무용총(舞踊塚), 장천1호분(長川一號墳) 등의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림의 내용은 말을 타고 사냥하는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매우 힘차고 씩씩하며 속도감과 박진감이 넘치는 특징을 보여 준다. 무용총의 수렵도는 특히 이러한 의미에서 주목된다.
백제와 신라의 수렵도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무사가 말을 달리며 동물을 향하여 활을 쏘는 장면을 담은 전(塼)이 남아 있어 당시에 수렵이 성행하였음을 잠작케 한다.
고려시대 수렵도는 공민왕(恭愍王)이 그렸다고 전하는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 잔폭(殘幅)들이 특히 우수하다. 이밖에 이제현(李齊賢)의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 역시 사냥을 떠나는 기마인물들을 묘사하고 있어 일종의 수렵도로 간주할 수 있다. 이들 작품으로 미루어 고구려에서 전해진 수렵 전통을 이어받고 몽골의 자극을 받아 수렵이 유행하였고, 종종 그림으로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수렵도가 자주 그려졌을 것이나 그 작례는 많지 않다. 1744년(영조 20)에 김두량(金斗樑)과 김덕하(金德廈) 부자가 합작한 「추동전원행렵승회도(秋冬田園行獵勝會圖)」에 묘사되어 있는 수렵 장면이 대표적이다. 겨울철에 노루, 꿩 등을 사냥하는 장면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조선 후기에는 호복(胡服)을 입은 기마인물들의 사냥 장면을 그린 호렵도(胡獵圖)가 민화에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어 서민들 사이에서 수렵도의 수요가 있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이처럼 수렵도는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또한 기마 민족으로서의 우리 민족의 생활상이나 기호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