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렵도는 오랑캐의 수렵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궁중에서 청 황제의 가을 사냥에 대한 관심 속에서 제작되었다. 호렵도의 호자는 오랑캐라는 뜻으로 청나라에 대한 증오와 열망이 담겨 있다. 청을 증오하면서도 청을 배울 수밖에 없는 이중적인 의식이 이 그림을 탄생시켰다. 조선 정조 때 김홍도가 제작한 것이 호렵도의 시작이다. 궁중 화풍의 호렵도와 민화풍의 호렵도는 많은 수가 알려졌다. 「호렵도병풍」, 「수렵도병풍」, 「호렵도병풍」 등이 대표적이다. 원래 군사적 목적으로 제작되던 호렵도는 민간에 전해지며 액막이와 길상의 이미지로 바뀌었다.
호렵도(胡獵圖)는 청 황제가 가을 사냥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의 명칭에 업신여기는 뉘앙스를 지닌 되놈 혹은 오랑캐란 뜻의 호(胡)자를 붙인 데에는 청에 대한 조선인의 증오와 열망의 이중적인 감정이 엇갈려 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조선에서는 청을 배척하자는 배청(排淸)의 여론이 들끓었다. 청에 볼모로 잡혀갔다 풀려 나온 효종(재위 1649~1659)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을 정벌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하지만 현실성이 부족한 북벌 정책과 의식 때문에 도리어 중국 문물이 들어오는 통로가 막히고 정치적 · 문화적 쇄국주의로 빠지는 부작용을 겪었다.
130여 년 뒤, 정조 때 불통의 국제관계를 타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홍대용 · 박제가 · 박지원 · 유득공 등 한양의 젊고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청의 존재를 인정하고 청을 배우자는 운동을 펼친 것이다.
강희제(康熙帝), 옹정제(雍正帝), 건륭제(乾隆帝)에 의해 청나라가 세계에서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고 문화가 융성하게 발전하였기에, 더 이상 청의 문물을 오랑캐라고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주장이었다.
이들 북학파(北學派) 또는 백탑파(白塔派, 이들이 원각사탑 주변에 살고 있어서 붙여진 명칭)의 의견을 정조는 적극 수용하여 개방 정책을 펼쳤고, 청이나 유럽의 문물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청을 미워하면서 청을 배울 수밖에 없는, 이중적인 의식이 호렵도란 그림을 탄생시킨 것이다.
원나라 황제의 수렵 장면을 그린 대렵도(大獵圖)는 고려 말 공민왕이 그린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에서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종종 제작되었다. 정조는 왕세자 때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에 관한 글을 썼고, 궁중 화원인 김홍도가 음산대렵도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정조 때 북학의 요구가 높아진 뒤 김홍도는 청나라 황제의 수렵 장면인 호렵도를 제작하였다. 이것이 호렵도의 시작이다. 전통적인 사냥 그림의 내용이 바뀐 것이다. 아쉽게도 그의 낙관이 분명한 작품은 전하지 않고, 김홍도풍의 영향을 받은 작품은 더러 보인다.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 6대 황제 건륭제의 70세 생일인 만수절 축하 사절단의 자제 군관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열하(熱河, 현재 허베이 성 청더 시)에서 연경으로 돌아오다가 건륭제의 조카 예왕(豫王)이 15세 되는 황손과 11세 되는 황손 둘을 데리고 사냥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비록 그곳이 목란위장은 아니었지만, 황손의 사냥 장면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황손은 사냥할 때 화총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강희제 때부터 궁중 사냥에 쓰인 것이다. 그런데 박지원은 당시 강희제가 사냥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을 민간에서 사고팔았다고 하였다. 아마 이런 유의 그림이 조선시대 호렵도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에 전해진 청나라 황제의 사냥 그림은 호렵도라는 한국적인 사냥 그림으로 변신하였다. 원래 청나라에서는 황제의 위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수렵도를 제작하였지만, 그것을 본떠 만든 한국식 호렵도는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름부터 그 목적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청나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침입을 받은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던 조선에서는 청나라에 대해 경각심을 늦추지 않고 그들의 전술 및 군사 훈련을 파악하기 위한 방편으로 호렵도를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궁중에서 제작되던 호렵도는 점차 민간에 퍼졌다. 민간에서 사용된 호렵도는 군사적 목적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무인들이야 자신들의 직업과 관련이 있기에 호렵도 병풍을 직업적인 브랜드로 활용하였겠지만, 순수 민간인의 경우는 그 목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몽골족이나 만주족과 같은 북방 민족의 호방한 기질을 담은 호렵도는 잡귀를 쫓는 액막이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평안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길상(吉祥)의 용도로도 쓰였다. 사냥 장면에 기린, 사자, 백호, 코끼리 같은 전혀 엉뚱한 서수(瑞獸)를 탄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길상을 상징하는 동물들이었다. 군사적 목적이 분명하였던 호렵도가 여느 민화와 다름없이 액막이와 길상의 그림으로 보편화된 것이다.
호렵도는 청나라 황제가 목란위장(木蘭圍場)에서 사냥하는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황제들은 가을에 이곳에서 정예군인 팔기군(八旗軍) 3000여 명을 비롯하여 1만 명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사냥을 즐겼다. 이를 목란추선(木蘭秋獮), 즉 목란의 가을 사냥이라고 하였다.
목란위장은 면적이 우리나라 경기도보다 넓어 세계에서 가장 큰 사냥터였다. 이곳은 고원의 초원이고 난하(灤河)가 휘감고 있으며 산림의 풍광이 아름다웠다. 황제들은 여기를 72개 구역의 사냥터로 나눴다. 강희제부터 가경제(嘉慶帝)까지 105차례에 걸쳐 가을 사냥이 진행되었다. 가을 사냥은 청나라 황제들의 가장 큰 군사 훈련이자 축제였다.
이처럼 대대적인 행사를 벌인 까닭은 팔기군을 비롯한 청나라 군사들을 훈련하기 위해서였다. 수렵을 통해 군사를 훈련하는 것은 몽골족의 풍속이었다. 보다 더 중요하게는 청나라 황제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몽골족을 회유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을 사냥에 몽골족을 비롯한 북방 민족을 참여시켰다.
목란위장의 가장 높은 산 위에는 청나라 황제가 사냥터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지금 그 자리에는 최근에 지은 정자가 있다. 목란위장의 초원은 평평한 곳도 있었지만, 언덕들이 파도치듯 굴곡이 심한 구릉지도 있었다. 단순한 평지라면 사냥이 덜 흥미로웠겠지만, 굴곡이 심한 구릉지에서는 사슴을 비롯한 짐승들이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드라마틱한 사냥놀이가 가능하였다.
정조 때 김홍도가 제작한 것이 호렵도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김홍도의 진작으로 확신할 수 있는 작품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김홍도풍으로 그린 것으로 파악되는 작품은 더러 보인다.
이후 궁중 화풍으로 그린 호렵도와 민화풍으로 그린 호렵도는 많은 수가 알려졌다. 대표적인 작품을 들면, 서울미술관 소장 「호렵도병풍」,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수렵도병풍」, 울산박물관 소장 「호렵도병풍」, 독일 개인 소장 「호렵도병풍」, 미국 뉴어크박물관 소장 「호렵도병풍」 등이 있다.
호렵도는 궁중에서 청 황제의 가을 사냥에 대한 관심 속에 제작된 그림이다. 이 명칭에는 한편에서는 오랑캐라고 무시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청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자는 이중적인 가치관이 내재되어 있다.
아무리 청이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하여 배움의 대상이 되었어도 ‘청나라=오랑캐’라는 인식을 끝내 버리지 못한 조선인의 의식 세계가 이 그림 속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원래 군사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이 그림이 민간에 전해지면서 액막이와 길상의 이미지로 바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