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영 ()

윤덕영
윤덕영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중추원부의장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중덕(仲德), 벽수(碧樹), 복영(福榮)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3년(고종 10) 12월 27일
사망 연도
1940년 10월 18일
본관
해평(海平)
출생지
서울
관련 사건
광무개혁|한일병합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윤덕영은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중추원부의장 등을 역임한 관료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73년(고종 10)에 태어나 1940년에 사망했다. 1895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906년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조문사로 다롄[大連]에 파견되었다. 1910년 ‘합병조약’을 체결하는 어전회의에 참석해 조인을 가장 적극적으로 가결시켰다. 국권피탈에 앞장선 대가로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정의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중추원부의장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1873년 12월 27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자는 중덕(仲德), 호는 벽수(碧樹),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영돈녕부사 윤철구(尹徹求)의 아들이며, 후작 윤택영(澤榮)의 형이다. 순종의 비(妃)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백부이고 처는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회장 김복수(金福綏)이다.

대한제국기에 비서원경, 의정부 찬정, 시종원경 등을 역임하였으며, ‘경술국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중추원 부의장 등을 지냈다. 1940년 10월 18일 사망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94년(고종 31) 식년시에 입격하고 이어 전시 병과에 합격했다. 1895년 7월 비서감 우비서랑이 되어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896년 1월 학부 참서관(參書官), 3월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겸 내각 참서관 겸 경연원 시독관, 7월 규장원 교서(校書)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독립협회에 보조금 5원을 기부했다.

1897년 2월에는 대행왕후(大行王后) 만장서사관(輓章書寫官)을 겸하였고, 11월 중추원 3등 의관을 거쳐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임명되었다. 같은 달인 11월 독립협회에서 개최한 대한국경축회에 참석했다. 1898년 2월 중추원 2등 의관으로 승진했으며,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물회 한성주재본국 박물사무위원, 10월 농상공부 참서관, 1899년 7월 내부 지방국장, 1900년 1월 법부 법무국장 겸 법률기초위원을 역임했다. 1900년 10월부터 1907년 3월까지 여러 차례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고, 1900년 12월 비서원경으로 재임하면서 서북철도국 의사장(議事長)을 겸했다. 1901년 1월 경기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경기재판소 판사를 겸했고, 5월 황해도관찰사로 전임되면서 황해도재판소 판사를 겸했다.

1902년 9월 일본이 경부선 철도부설에 착공하자 철도원 부총재로 임명되며 중앙관청으로 복귀했고, 10월 지계아문(地契衙門) 부총재로 자리를 옮겼다. 1903년 9월 비서원경 겸 내장원 감독으로 중앙은행 창설 사무위원을 맡았다. 1904년 3월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어 5월 평리원 재판장을 겸했고 7월 의정부 찬정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4월 일성의숙(一成義塾) 숙장을 맡았다.

1906년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다. 1907년 4월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日講官)에 임명되었고, 5월 태의원경 겸 황후궁대부(皇后宮大夫)를 겸임했다. 10월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서보장을 받았고, 11월 임시황실어진용급위호사무정리위원장(臨時皇室御進用及衛護事務整理所委員長)으로 선임되었다. 황후궁대부로 재임하면서 1908년 6월 시종원경과 10월 국조보감 교정관을 겸임했다. 같은 해 2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조직된 대동학회 회원으로 참여했고, 8월 기호흥학회에서 찬무부 찬무원 및 특별찬성회원, 10월에는 일본적십자사 특별사원으로 위촉되었다. 그해 권상사(勸商社)를 발기해서 조직했으며 한성부민회 산하단체인 한성북부 관진방회(觀鎭坊會) 부회장에 선임되어 10월에 100환을 기부했고, 내부 한성위생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1월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으로 위촉되었다.

1909년 1월과 2월 순종이 남쪽지방( 대구, 부산, 마산)과 서쪽지방( 의주, 평양, 정주, 황주, 개성)을 순행할 때 호종(扈從)했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고종의 조문사(弔問使)로 다롄[大連]에 파견되었고,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 관민추도회를 발의하여 장충단에서 궁내부 대표로 치전(致奠)하고 추도제문을 낭독했다. 이어 12월에는 일본적십자사 한국지부와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이토 히로부미 사망 50일 추도회에 참석했으며, 대동교회(大同敎會) 찬교원으로 선임되었다. 1910년 8월 시종원경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하는 어전회의에 참석해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협박 · 회유에 동의하여 조인을 가장 적극적으로 가결시킴으로서 ‘경술국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국권피탈에 앞장선 대가로 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일본 정부에게서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천황 메이지[明治]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행사에 초대받아 천황이 주는 주병(酒甁)을 받았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5만원을 받았고, 2월 이왕직 찬시(賛待)에 임명되어 1919년 10월까지 재임했다. 같은 달인 2월에 조양구락부 유지회를 발기해 조직했고, 3월에는 사립 오성학교(五星學校)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農談會)에서 찬성원으로 활동했다. 1912년 1월 이문회(以文會)를 창립할 때 참여했으며,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3년 7월 귀족들의 식림사업을 위해 조직된 조선임업조합 보식원 창립총회에 참석해 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15년 7월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 5주년을 선전하기 위한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특별회원으로 250원을 기부했고, 9월 가정박람회(家庭博覽會) 명예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주는 유공상을 받았고, 11월 다이쇼[大正] 천황 즉위대례식에 조선귀족 대표로 참석해서 처 김복수와 함께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7년 6월 순종이 ‘일본천황부부 알현’을 위해 일본으로 갈 때 배종했다. 같은 해 10월 친일 불교단체 불교옹호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1918년 8월 경성구제회에 500원을 기부했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하자 고종국장 장의괘(葬儀掛)와 제관부장(祭官部長)으로 임명되었다. 2월 「왕세자전하의 어혼의(御婚儀)는 일선일가(日鮮一家)의 화기(和氣)」(『반도시론』1919.2.)라는 글을 통해 왕세자 이은(李垠)과 일본 황실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의 결혼이 일선융화의 상징이라고 주장했다. 6월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 발기인, 10월 이토 히로부미 십년제[伊藤博文十年祭] 발기인, 12월 경성삼종현물매매시장(京城三種現物賣買市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0년 2월 조선식산은행 감사에 선출되어 1930년 10월까지 재임했다. 1920년 4월 금배(金杯)를 받았고, 6월 해동은행 설립에 참가해 1대 취체역 사장과 1923년 3대 사장에 취임했다. 1921년 일선신탁㈜ 발기인, 1922년 9월 조선협회 고문으로 활동했다. 1924년 2월 훈1등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받았고, 6월에는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 회원으로 참여해 그해 10월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5년 7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940년 8월까지 연임하며 매년 3,000원씩 수당을 받았다.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국장 주감제거(主監提擧) 및 고문에 임명되었고, 11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창립총회에 참석해 취체역에 선임되었다.

1928년 8월 식민통치 20주년을 기념해서 개최하는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를 발기해서 평의원으로 선임되었고 300원을 기부했다. 같은 해 9월 조선식산조성재단 평의원에 위촉되었고, 11월에는 처 김복수와 함께 쇼와[昭和]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5월 조선저축은행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9월에는 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해 설립한 창복회(昌福會)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12월 수양단 조선연합회본부 찬조원, 1931년 11월 단군신전봉찬회(檀君神殿奉讚會) 고문, 1932년 5월 조선방송협회 고문, 7월 만주국 건국기념으로 개최한 신흥 만몽박람회 고문, 1934년 4월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고문, 1935년 5월 세계홍만자회조선주회(世界紅卍字會朝鮮主會) 주석회장에 추대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제가 식민통치 25주년을 기념한 시정25주년기념표창과 은배를 받았다. 1937년 3월 조선신궁에서 열린 기년제(祈年祭)에 참석했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한 직후인 1937년 8월 조선총독부 시국간담회에 참석했다. 9월 친일시국단체 동요회(同耀會)에서 육해군 국방비 1만원을 헌납할 때 500원을 기부하였으며, 조선신궁에서 열린 국위선양 무운장구(武運長久) 기원제에서 조선귀족 대표로 행사단장을 맡았다. 12월부터 1938년 1월까지 북중국 전선에 있는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북지황군위문단(北支皇軍慰問團)을 조직해서 중추원과 조선귀족 대표로 텐진, 베이징을 방문했다. 1938년 2월에는 지원병제도 실시를 환영하는 「국민된 책임의 중대함을 통감」(『매일신보』1938.2.23.)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4월 조선신궁에서 열리는 지원병제도 실시 봉고제(奉告祭)에 참석했고, 5월 경학원 대제학 겸 명륜학원 총재와 조선실업구락부 고문에 선임되었다. 같은 달 조선신궁에서 열린 쉬저우함락 축하 봉고제에 참석했으며, 6월 육군지원병훈련소 개소식에 수차례 참여했다.

1938년 6월 조선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8월 시국대책조사회 위원에 위촉되었고, 10월 추계 석전 경학원 명륜당 강연에서 ‘시국의 인식과 유림의 각성’이라는 주제로 중일전쟁을 찬양했다. 1939년 2월 경성부 육군병지원자후원회 고문, 3월 육군서도(陸軍書道)전람회 고문, 4월 동양의약협회 총재에 위촉되었다. 같은 달인 4월 금을 정부에 팔자는 운동에 호응해 1,000원에 상당하는 금품을 헌납했으며, 7월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 상담역, 10월 조선유도(儒道)연합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39년 11월 흑룡회가 주최한 ‘일한합병’ 30주년을 맞이해 이완용, 이용구, 송병준 등을 추모하는 추도식에 참석했다.

1939년 12월 박영효 사망으로 공석이 된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된 후 전시 총동원시책에 부응하겠다는 「직책을 다할 각오」(『매일신보』1939.12.19.)라는 소감을 발표했다. 1940년 1월 조선귀족대표로 조선신궁에서 열린 기원 2600년 맞이 세단제(歲旦祭)에 참석했고, 경성일보사에서 주최하는 기원 2600년 및 시정 30주년 기념 조선대박람회 고문으로 추대되어 9월 개회식에서 ‘천황폐하 만세’ 봉창을 맡았다.

1940년 8월 중추원에서 조선인으로 최고 지위인 부의장에 올랐으며, 9월 조선총독부 교육심의위원회 위원, 10월 왕공족(王公族)심의회 심의관으로 위촉되었다. 대지주로서 1929년 충청남도에 토지 100정보 이상과 1937년 6월 경기도 파주안성에 논밭 30정보 이상을 소유했으며, 1933년 2월 기준으로 재산 100만원 이상을 가진 대부호였다.

윤덕영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6 · 7 · 8 · 9 · 11 · 17 · 18 · 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85∼20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일성록(日省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 200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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