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 설화 ( )

삼국유사 / 만파식적 설화
삼국유사 / 만파식적 설화
구비문학
작품
신라시대 용으로부터 영험한 대를 얻어 피리를 만들었다는 내용의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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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신라시대 용으로부터 영험한 대를 얻어 피리를 만들었다는 내용의 설화.
개설

신이담(神異譚)에 속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만파식적조와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1 악조(樂條)에 실려 있다.

내용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다. 682년(신문왕 2)에 해관(海官)이 동해안에 작은 산이 감은사로 향하여 온다고 하여 일관으로 하여금 점을 쳐 보니,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수성(守城)의 보배를 주려고 하니 나가서 받으라 하였다.

이견대(利見臺)에 가서 보니, 부산(浮山)은 거북 머리 같았고 그 위에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풍우가 일어난 지 9일이 지나 왕이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하여, 그것을 가지고 나와 피리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 이 피리를 불면 평온해져서, 만파식적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 뒤 효소왕 때 이적(異蹟)이 거듭 일어나,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하였다.

의의와 평가

감은사지가 있던 내에서 종소리 또는 물 끓는 소리가 난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하는데, 이로 보아 만파식적의 소리로 왜적을 물리쳤다는 등의 이야기는 이러한 지형적 특수성과 기상 변화에 기인해서 나는 소리로 일어났던 결과가 아닌가 한다.

만파식적은 악기로서 단군신화의 천부인(天符印),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 이성계의 금척(金尺) 등과 같이 건국할 때마다 거듭 나타난 신성한 물건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에 이어서 즉위한 신문왕은 정치적 힘의 결핍과 일본의 침입이라는 문젯거리를 타결하기 위하여 지배층의 정통성과 동질성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강력한 왕권을 상징할 수 있는 신물을 등장시키기 위해 이러한 신화를 만들었으리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통일신라의 건국신화가 구체적 모습을 갖추면서 형성될 수 있었으나, 그 의미가 왕권에 관한 것으로 한정되고 사회 조직의 원리와 이념을 구현하고 있지는 않아서, 신화의 기능이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
「만파식적설화의 연구」(장장식, 『미원우인섭선생화갑기념논문집』, 집문당, 1986)
「만파식적설화고」(김영태, 『삼국유사의 연구』, 동북아세아연구회, 1982)
「방언에서 본 만파식적과 문무왕릉」(서정범, 『한국민속학』8, 1981)
「만파식적설화의 형성과 의의」(김상현, 『한국사연구』34, 1981)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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