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영선(金永善)은 12세 되던 1904년 당시 후사가 없었던 김규진(金圭鎭)의 양자로 들어왔으며, 1907년 천연당사진관(天然堂寫眞館)이 개설되자 이곳에서 다년간 종사하면서 사진술을 익히고 사진기사로 활동했다. 1911년 김규진의 친자인 청강 김영기(金永基)가 태어나자 김영선은 자연스럽게 파양되어 평양으로 돌아갈 뜻을 비쳤으며, 이에 김규진은 김영선을 위해 평양에 천연당사진관의 분점인 기성사진관을 개설해주었다.
1912년 9월 17일 개설된 기성사진관은 평양 옥동(玉洞)에 일본식 2층 건물을 신축하고 시설 일체를 갖추어 고객들을 맞았다. 기성사진관이 위치했던 옥동은 옥골로도 불렸으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명이 수옥리(水玉里)로 바뀌었다.
당시 평양에는 이와시타[岩下]와 아마야[天谷]라고 하는 일본인 사진사가 운영하는 사진관 두 곳만이 있었는데, 김영선이 기성사진관을 개설하면서 평양에도 조선인 사진사가 운영하는 사진관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김영선은 사진관 개설 당시 평양에서 활동하던 김유창(金裕昌)의 도움을 받았으며, 직책은 둘 다 주임이었다.
김영선은 실질적인 기성사진관의 관주였지만, 천연당사진관의 분점 형식으로 개설되었기 때문에 개관 초기에는 주임이라는 직책이 주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유창은 1920년대 초반까지 기성사진관의 사진기사로 있다가 1924년경 독립하여 평양사진관(平壤寫眞館)을 개설했다.
김영선은 1914년 7월 기성사진관 부설로 고금서화관(古今書畵館) 평양지점도 개관하였다. 고금서화관은 1913년 김규진이 천연당사진관 내에 개설한 최초의 근대적 상업화랑으로, 김영선은 천연당사진관에 이어 고금서화관의 분점까지 개설하기에 이른다. 1921년 기성사진관의 신문 광고를 보면 그 위치가 수옥리 남문정(南門町)으로 되어 있어 1920년을 전후해서 사진관을 옮긴 것을 알 수 있으며, 1920년대 중반에는 서문 안 장별리(將別里)로 다시 이전했다.
김영선은 기성사진관과는 별도로 1935년경 둘째 아들인 김인환(金仁桓)에게 사진관을 차려주면서 사진관 이름을 천연당사진관이라 칭했는데, 1933년 사망한 양부 김규진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김영선은 1930년대 들어 조선인 사진관과 사진업자들이 점증하자 사진조합 및 사진단체를 설립하는 등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특히 1931년 영업사진사들의 권익 보호와 정보 교환 등을 위해 평양사진동업자조합이라는 사진조합을 창립하여 이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김영선은 이 조합의 초대 조합장을 역임했으며, 1936년 설립된 모란봉사진조합에도 가입하여 1938년 부조합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사진업 외에 사진창작 활동도 병행했다. 1934년 사진관을 운영하던 서순삼(徐淳三), 장승엽(張承燁), 현일영(玄一榮)과 조각가 문석오(文錫五) 등과 함께 결성한 오월회(五月會)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매년 회원전을 갖기도 했다. 이처럼 김영선은 다양한 사진 활동을 전개하면서 평양 사진계의 형성과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김영선의 차남인 김인환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로 남하한 후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천연당사진관을 개설했으며, 1953년 환도 후에는 서울 종로1가에서 천연당사진관이라는 이름으로 사진관을 계속 운영하였다. 1976년 김인환이 사망하자, 아들인 김대영(金大英)이 이어받아 1977년까지 운영하기에 이른다. 이로서 김규진의 천연당사진관은 양자인 김영선의 기성사진관으로, 다시 그의 아들인 김인환의 천연당사진관으로 그 계보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