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주1은 직업 사진사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작가로 데뷔하고 작품 활동을 하는 무대로서, 예술사진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해왔다. 한국에 예술사진이 들어온 것은 1900년대이며, 주로 재 조선 일본인들이 조직한 사진 단체의 회원전을 통해 작품 활동이 이루어졌다. 1910년대 중반에 이르면 사진 단체에서 주최한 공모전이 개최되기 시작했으며, 1920년대에는 사진 단체 뿐만 아니라 사진재료상, 그리고 언론매체에서도 다양한 사진 공모전을
관전(官展)주2 성격의 공모전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최되기 시작했는데,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주3사와 주4사가 주도하였다. 특히 1934년 경성일보사가 전조선사진연맹(全朝鮮寫眞聯盟)과 공동으로 주최한 『조선사진전람회』는 조선총독부가 1922년 창설한 『조선미술전람회』에 준하는, 일제강점기 최고 권위의 사진 공모전이었다.
그러나 『조선사진전람회』는 관변 단체인 ‘전조선사진연맹에 가입한 5인 이상으로 조직된 사진 단체에 소속된 사진가만이 출품할 수 있다’는 규정 때문에 참여의 제한이 있었다. 그리고 심사위원이 모두 일본인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인 사진가들의 입상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또한 공모전의 주제는 ‘자유’였지만, 주5 문화정책에 부응하도록 조선향토색과 군국색이 농후한 작품을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심사 기준은 창작 활동을 제한하는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아마추어사진가들이 작품을 발표하고 조선인 스스로 심사하고 표창할 수 있는 대항 공모전이 요구되었다. 1936년 8월 공모를 시작한 조선중앙일보사의 주6은 이러한 요구 속에서 탄생했으며, “조선의 사진예술계에 새로운 기축(機軸)을 세우고자” 만든 사진공모전임을 표방했다.
조선중앙일보사에서는 이 공모전의 권위와 대표성을 위해 조선사진연구회, 경성인상사진연구회, 경성사진학강습원사우회, 경성사진사협회, 평양사진조합초상연구회, 평양오월회 등 경성과 평양의 대표적인 조선인 사진 단체 6곳의 협력과 찬조를 받았다. 그리고 당시 사진계를 이끌던 박필호[경성인상사진연구회 대표], 현일영[조선사진연구회 동인], 김광배[경성사진사협회 회장] 등 각 사진 단체 대표들의 축하 메시지를 지면에 게재하였다. 그만큼 이 공모전은 조선인 사진가들의 많은 관심과 기대를 받았다.
1936년 8월 27일자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제1회 전조선사진작품모집』의 출품 규정을 보면, 모집 대상은 ‘초추(初秋)’를 주제로 한 풍경 · 인물 · 스케치 · 기타의 사진으로, 작품 크기는 캐비넷[cabinet]판 이상 4절 이내의 밀착 및 확대 인화로 정했으며, 출품 자격과 출품 점수는 무제한이었다. 제출 기한은 9월 30일까지로 했으며, 시상은 특선, 준특선, 입선, 가작의 네 종류로 하여 각 입상작마다 상장과 부상을 제공한다고 공지하였다.
이는 조선중앙일보사가 1933년 1월 주최한 『명승고적풍속사진현상모집』의 출품 주7과 비교해보면 진일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전조선사진작품모집』은 제도적으로 완비된 공식적인 사진 공모전으로서 출발했던 것이다.
『조선중앙일보』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 일장기말소사건’에 연루되어 9월 5일 무기 정간 처분을 받게 되자, 이 공모전도 무기 연기되었고, 끝내 열리지 못했다. 비록 조선인 언론이 주최한 최초의 공식적인 사진 공모전은 무산되었지만, 1년 뒤인 1937년 조선일보사가 『납량사진현상모집』이라는 명칭으로 사진공모전을 1940년까지 매년 주최하여 그 맥을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