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사진을 생산했던 초기의 일본인 사진관으로는 옥천당(玉川堂), 생영관(生影館), 무라카미사진관[村上寫眞館] 등이 있으며, 이곳에서는 주로 낱장의 형태로 기생사진을 판매하였다. 뒤이어 1907년 경성사진관(京城寫眞館)에서는 일한서방(日韓書房)이라는 출판사와 공동으로 『한국풍속풍경사진첩』[제1집 1907년, 제2집 1907년, 제3집 1908년]을 연달아 발행하였다. 이 사진첩에는 각 권마다 공히 32점의 사진이 실려 있는데, 기생사진을 필수적으로 포함시켰다.
사진엽서의 본격적인 생산은 민영 인쇄소가 주도하였다. 문아당(文雅堂)과 보인사(普印社) 등 1900년대 설립된 조선인 운영의 인쇄소에서도 사진엽서를 취급했지만, 1901년 본정2정목[현재 충무로2가]에 설립된 일본인 인쇄소인 히노데상행[日之出商行]은 사진엽서를 전문으로 취급한 대표적인 인쇄제작소였다. 이곳에서는 ‘조선풍속’을 비롯하여 ‘경성’, ‘조선명소’ 등 다양한 주제의 사진엽서 시리즈를 제작했으며, 기생사진은 대표적인 아이템의 하나였다.
이처럼 초기의 기생사진은 재조선 일본인 영업 사진관이나 민영 인쇄소를 중심으로 제작되었으나, 강제병합 이후 1910년대에는 조선총독부 산하 기관에서도 기생사진을 적극적으로 생산하였다. 먼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1914년 1월 28일부터 6월 11일까지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을 연재하면서 모두 99명의 주3을 프로필사진과 함께 소개하였다. 그러나 ‘예술계 인물 100명을 소개하겠다’는 이 연재물의 기획 의도가 무색하게 대부분 기생 소개에 지면을 할애했으며, 그 숫자는 91명에 달하였다.
이 연재가 끝난 지 4년 뒤인 1918년에는 「예단일백인」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조선연구회 · 신구서림 발행]이 발간되었다. 조선총독부의 또 다른 기관지인 『경성일보』의 사장이었던 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가 지송욱(池松旭)의 도움을 받아 발행한 이 책은 전국의 기생들을 지역별 · 권번(券番)별로 정리했으며, 기생 605명의 프로필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1920년을 전후해서 기생 문화가 대중화되고 유흥 및 관광 산업이 커지자, 기생조합[권번]과 주4에서도 홍보용 안내 책자나 사진엽서를 자체 제작하면서 기생사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평양의 기성권번에서 발행한 『기성기생사진집(箕城妓生寫眞集)』[발행연도 미상]과 『기성기생명감(箕城妓生名鑑)』[1938년]이다. 『기성기생사진집』은 조선사진공예사(朝鮮寫眞工藝社)에서 제작을 했으며, 여기에는 기생 176명의 초상사진이 실려 있다. 『기성기생명감』은 협판인쇄소(脇坂印刷所)에서 촬영과 인쇄를 맡았으며, 기생 384명의 초상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요릿집에서도 사진사를 고용해 사진엽서를 제작해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사진엽서에는 요릿집 전경 실내 풍경, 이곳에 소속된 기생들의 공연 및 일상 모습, 요릿상 등을 담았으며, 이곳을 방문한 고객들에게 기념품으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조선요릿집인 명월관도 홍보를 위해 인근에 있던 금광당사진관(金光堂寫眞館)에 촬영을 의뢰했으며, 이곳에 소속된 기생들도 개성 넘치는 프로필 사진을 찍기 위해 이 사진관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기생들은 촬영된 사진을 명함 크기의 사진으로 제작하여 홍보에 활용하였다.
개항기주5와 근대계몽기를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기생사진은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생산되었다. 실물사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인쇄사진으로 제작된 기생사진은 서구의 주6과 주7의 식민담론 창출을 위해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생을 대상으로 한 문화산업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즉 기생은 서양인의 이국취향을 자극하는 대표적인 조선 풍속의 하나로 발견되었으며, 조선의 주8과 주9을 강조하기 위한 타자의 이미지로 창출되었다. 나아가 이렇게 발견되고 창출된 기생과 기생이미지는 유흥 및 관광산업을 위한 홍보와 호객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기생에게는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졌지만, 기생사진 모두가 이런 이미지로만 표상된 것은 아니다. 그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자발적으로 사진관을 찾아 과감한 포즈와 자신 있는 표정을 보여준 기생들의 초상사진도 발견되는데, 이는 기생이 늘 타자로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근대적 주체로서 자기 표상을 만들어가고자 했던 자의식의 표출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