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계』는 1913~1917년 신문사가 발행한 월간 종합잡지이다. 1913년 4월 5일 일본인 다케우치 로쿠노스케가 '신문사'를 세우고, 『신문계』를 발간하였는데, 2개월 전에 발행한 『신문세계』를 개제한 것이었다. 다케우치는 1904년에 조선으로 건너온 뒤 잠깐 상업에 종사하다가 1910년대 조선의 출판계를 이끈 대표적인 재조 일본인이었고, 일본과 조선의 동화를 주장한 열렬한 동화주의자였다. 그리고 동화주의의 관점에서 『최신실용 조선백과사전』[1915년], 『조선상업총람』[1915년] 등의 책을 펴냈다.
1913년 4월 5일 경성 장곡천정[長谷川町: 현재의 소공동]에 소재한 신문사(新文社)에서 『신문계(新文界)』창간호가 나왔다. 신문사 사장인 다케우치 로쿠노스케[竹內錄之助]가 편집 겸 발행인이었는데, 신문사(新文社)를 세우고 2개월 전에 발행한 『신문세계(新文世界)』를 개제(改題)한 것이었다. 인쇄는 경성인쇄소, 인쇄인은 무네카타 이츠[宗像イツ]였다. 창간 당시 가격은 15전이었다. 일본인이 발행했지만 특이하게도 일본어가 아니라 한글과 한문을 혼용한 잡지였다. 1913년 12월 신문사에서 창간한 『우리의 가뎡』은 아예 순한글 잡지였다.
‘신문’은 ‘상고의 중고문’이나 ‘중고의 중고문’과는 다른 주1을 가리킨다. 곧 ‘신문’으로 ‘신반도 신청년’에게 명랑을 주는 것이 다케우치가 내세운 잡지 창간의 목적이었다.
목차에는 필자를 표기하지 않고 제목만 나열했다. 이름이 확인되는 필자는 일본인 8명, 조선인 81명, 필명을 사용한 필자 52명이다. 재조 일본인이 간행한 잡자 가운데 조선인 필자의 비중이 가장 높았다.
기자나 고문으로 참여한 조선인이 여럿인데 그 가운데는 신소설 작가 최찬식(崔讚植), 문인 백대진(白大鎭), 국어학자 강매(姜邁) 등도 포함된다. ‘국어’[=일본어]는 고정 지면에서 회화, 독해, 서간문 작성 등을 가르치려고 하였다. ‘신청년’이 본받아야 할 인물로 주2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의 일본인과 이응선[李應善: 조선매약], 김덕창[金德昌: 김덕창염직공소], 김윤수〔金潤秀: 동양물산주식회사〕, 박덕유[朴德裕: 박덕유양화점] 등의 조선인 자본가, 경제적으로 입신한 인물들을 소개하였다. 소설, 한시 및 시조 등의 문학 작품도 상당수 실려 있다. 21편의 소설 가운데 백대진이 쓴 것이 16편을 차지한다. 기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근대 과학 기술의 성과 소개였다.
창간 이래 발행처, 편집 겸 발행인이 바뀌지 않았다. 종간 때까지 발간을 거른 적도 없다. 1917년 3월 5일 통권 제48호가 종간호였다.
다케우치는 신문계를 종간한 뒤 바로 일본 도쿄에서 반도시론사(半島時論社)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17년 4월 10일 한글과 한문을 섞어서 쓴 시사 종합 잡지 『반도시론』을 창간하였다.
다케우치는 최남선과 함께 1910년대 조선의 출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최남선이 경영하던 신문관(新文館)의 잡지들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자주 휴간 조치를 당하고 심지어는 폐간 처분을 당한 데 비해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폐간 때까지 꾸준히 발행되었다.
다케우치는일본과 조선의 동화를 위해서는 조선인 등용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열렬한 동화주의자였다. 그리고 동화주의의 관점에서 『최신실용 조선백과사전』[1915년], 『조선상업총람』[1915년] 등의 책을 펴냈다. 그러한 다케우치의 동화주의 인식은 지면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이 조선의 주체적 근대화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거세했다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하였다. 나아가 조선 역사를 부정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주3화가 오히려 근대 문명을 가져다주었다는 환상을 심어주려고 하였다. 다만 무단 통치 아래에서도 한글과 한문을 혼용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